표창원 교수를 보며

Julius Chun – 담벼락 2013년 2월 23일

“면제의 대물림을 하는 자, 그는 보수가 아니다. – 보수는 의무를 지킨다. 의무를 넘어서 자신을 희생한다. 위법과 탈법을 일삼으며 권력으로 치부를 가리는 자, 그는 보수가 아니다. – 보수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하다. 부끄러움을 알고 공익을 위하는 것이 보수다. 입을 막고 종북과 좌빨을 외치는 자, 그는 보수가 아니다. – 보수는 비판에 당당하다. 자신의 길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 것이 보수다. 권력의 그늘에서 시민의 피를 빠는 자, 그는 보수가 아니다. – 보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노력한다.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수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자, 그는 보수가 아니다. – 보수는 민주주의의 파수꾼이다. 과거를 엄정히 평가하고 화해로써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 보수다.” (표창원 교수 신간 보수의 품격 머리말 중에서)
나는 중도다. 어디가서 이렇게 내놓기 부끄러운 표현이 또 없다. 자칫 양비론이나 무관심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혹은 진보나 보수의 깊은 논의들에 무지하거나, 그들을 너무 가볍게 치부하고 있는건 아닌가 돌이켜보게 되기에. 하지만 깊이는 없어도 보수나 진보를 치우침 없이 겪어 봤다고 생각하는데 부끄럽게도 어느 쪽에서도 마음의 울림을 얻지 못했다. 양심을 가린 대책 없는 극단주의를 훨씬 많이 느꼈다고 밖에.
빨갱이를 미워하는 마음과 독재를 미워하는 마음, 둘다 잘 살펴보면 애국심의 발로이며 이 사회의 붕괴에 대한, 혹은 불의에 대한 절절한 걱정에서 발현 됐을 것이다만, 결국 그것을 낚아채가는 형태란 증오다. 누구나 증오하고 싶고 미워하고 싶고 이지매를 하고 싶고 우월하고 싶고 남을 깔아뭉개고 싶어한다. 그것을 정의의 이름을 대충 빌려 양심의 소리를 막은 채 마음껏 발휘하게 해주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 좌우의 방향보다 품격의 문제, 건전성의 문제가 비교할 수 없이 더 시급하단 생각을 한다.
산새들과 들짐승들의 목을 축여줄 귀한 개울물로 시작 되었다 해서 하류에서 재앙을 불러오는 강의 범람을 예찬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자성 없이 동으로 흐르는 물이 서로 흐르는 물보다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얘기할 수 있는가.
좌우 둘 다 나쁘기만 하다는 게 아니다. 둘 다 싫다는게 아니다. 둘 밖에 없는게 아니란 얘기를 하고 싶다. 진보와 보수 그 부와 권력의 재조정의 문제보다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와 집중력을 다른데 더 투자해야 한다. 권력의 양상과 폭력의 양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어떻게 우리를 해치는지.
아나키즘이 중도라 불릴 수는 없겠지만, 좌도 우도 아닌 것이 아나키즘이라 중도라는 임시적 이름을 빌릴 수 밖에. 목에 핏대 세우고 빨갱이나 독재를 욕하는 사람의 증오에 찬 눈빛을 잘 보라. 교만과 몰이해와 파괴본능이 더 많지 않은지. 정치라는 이유로 잘 알지 못하는 타자의 얘기를 인격모독적으로 씨부린 적 없는지 돌아보자. 저급한 수준에선 좌도 우도 같은 이름을 달아야 한다. ‘저급한 정치놀이’라고. 용서가 없는 변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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