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목적

2015년 3월 22일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
크게는 지식의 함양과, 사회적 혹은 여타 조직적 ‘기능’을 습득하는데 있을 것이다. 사회성도 이 안에 포함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의 습득.

이에 대해 두가지 관점에서 반론을 해보고 싶다.
첫째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측면이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인지, 우리에게 필요한 기능인지를 살펴보고, 과연 애초에 교육 과정이 잘 짜여져 있는지와 다른 대안은 없는지를 현존하는 질서내에서 찾아보자.
두번째는 시대를 떠나서 과연 교육이 지식과 기능을 가르치는게 맞는지에 대한 보다 실존적인 질문이다. 나는 지식과 기능이 핵심이 되어선 안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인격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모 도지사님 말씀처럼 밥 먹을려고 학교 다니는 것도 아니다)

일단 시대적 관점.
우리의 국영수 암기 및 습득식 교육의 모태는 물론 19세기말의 프랑스식 공교육이다. 이는 산업화 속에서 아해들이 공장에 들어가 제 기능을 못할까봐 일종의 평등한 OS 와 기초 소프트웨어 번들 장착을 그 철학적 틀로 한다. 수학도 해야 되고 보편화된 소통도 해야 되고 더 고차원의 기능성 지적 활동의 기반을 닦고자 함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근간은 꼭 필요한 공부 + 알파다. 알파는 지적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만들어졌기도 하다. 전혀 필요하지 않은 공부도 와중에 많이 섞여들게 된 계기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시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유능한 인재들’의 기준을 거대한 조직 내에서 통용되는 규격화된 소통 방식과, 기본적 지식을 검증된 지적 능력이라는 차원에서 ‘학벌’ 등으로 걸러내는 나름 나쁘지 않은 수단이 되었다. 19세기 프랑스를 쫓아가느라 바쁘던 그때엔 학교 공부가 실제로 여러 주요 기능을 했고, 이후에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그러한 공부의 연장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질보단 양이 더 중요하던 시대에 많은 과학자와 교육자가 필요했다.
그래도 인간은 인간인지라, 규격 속에서도 다양한 창의력과 엄청난 근성과 예리한 통찰과 유연성과 카리스마를 갖춘 인재들은 학벌의 제한 없이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헌데 물론, 그러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애당초 일찌감치 학벌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상위권 학벌을 많이 독점해놓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어느모로 보나 학벌과 공부는 뛰어난 인재를 찾을 수 있는 과히 강력한 지표가 되었다. 후행지표이면서도 선행지표이기도 했던 것이지.

그런데 지금의 시기는 어떨까.
혹자는 공부나 학벌은 국내에선 영원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들이 말하는 영원은 물론 지난 50년간 한국이 이룬 인류 역사에서도 흔히 찾기 힘든 초고속 산업화라는 블랙스완 속에서 자신과 수천 수만명의 동시대인들이 끝없이 봐왔던 패턴이었을 것이다. 역사적 컨텍스트는 없으나, 당사자들이 평생 봐온 절대 무너지지 않은 패턴이라는 점에서는 수긍이 가고, 그들이 며칠 밤을 새어 긍정적 사례들을 읊어볼 수 있는 경험임은 인정한다. 또한 인류의 지적 능력이 가장 파급효과가 큰 부가가치를 생산한다는데에 그 누가 반박하랴. 해서 그런 논리는 엔간한 논쟁에서 밀릴 수가 없다. 더군다나 ‘너 학벌 컴플렉스 있냐? 있나 보네’ 라는 치트키가 있는 이상 국내에서의 정설은 학벌이 영원히 영원하고 대단히 대단하기를 지속할 것이라는 것일기다.
헌데 다시 한번, 지금의 시기는 어떨까?
첫째로는 우리나라가 급격한 산업화, 즉 규격화와 대량화의 시기가 끝났다는 점이 우려일 것 같다. 되려 지식 사회로 향해가야 한다. 지식을 쌓는 최선의 길이 학교 수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원히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자명하듯. 다만 인터넷 이전의 시대에는 ‘공부를 하는 방법’ 자체가 학교 외에서 배우기엔 꽤나 진입장벽이 있던 터. 공부 하는 방법과 습관을 장착하면 결국 공부는 책을 보거나 자신이 찾아듣는 강연을 통해서 습득한다.
헌데 우리 학교는 무엇을 가르치나. 지식과 기능을 가르친다지만 지식과 기능은 전부 학원 가서 배우는 시대에 우리는 죽은 지식을 꾸역꾸역 가르친다. 19세기 산업역군을 생산하듯. 지식을 배울 곳이 학교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가르쳐도 모자랄 판에, 학교는 지식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지식만 가르치고 있다. 이미 심각한 자기모순이다.
두번째로는 우리나라의 문제가 아닌 세상의 문제다. 세상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더 많은 야무진 블루칼러와 더 똘똘한 화이트칼러가 필요한 세상일까? 전세계가 창의력을 외치고 있고 심지어 대한민국이 낳은 보기 드문 시대 역행적 리더 마저도 창조 경제를 논하고 있다. 굴뚝 산업의 한계는 이제 모두가 절감한다. 지식 산업에서는 동일한 것을 배워 대량 복제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남과 다른 방법을 고민하고 남이 생각 못한 것을 깨쳐내야 하는 사회다. 이런 얘기에 반론이 달릴 여지 마저 없다. 여전히 굴뚝산업이 대세이고 영원히 대세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 굴뚝산업 속에서 똑같은 인재가 필요하고 조직 생활 사회 생활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러나 ‘경쟁이 더 격심해졌어’라는 꼬리표를 단 채 예전에 하던 그대로 달달 외우고 남과 똑같은 교과서를 익히며 단지 조금더 잘하면 된다고 믿는 사람들 많을 것이다. 그게 학벌론의 여전한 주기도문이다. 친구보다 수학을 더 잘 풀고, 토익을 더 잘 받지 않으면 애미애비들은 미쳐버린다.
지금 세상에 수학도 토익도 사람보다 더 잘하는 컴퓨터가 있고, 내 자식보다 더 잘하는 사람만 해도 5억명이 있다. 창의적 인재가 그 5억 명 중에서 최소한 일정 이상은 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그것만이 최우선 과제라고 진심으로 얘기할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은 현재다. 그러나 미래는 더욱 다르다.
미래는 더욱 바쁘다. 컴퓨터의 발전은 지금까지의 양상과는 매우 다르게 돌아갈 것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해감에 따라 대다수의 화이트칼러는 현재의 직업을 잃을 것이다. 은행에서 제조업 본사에서 우리네 아버지들이 수십년간 해오던 직무들의 대다수는 사라질 것이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더 고도화된다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절대적 인구는 엄청나게 줄어들 것이다. 자리는 더 희박할 것이고 당연히 비슷한 수준의 능력이라면 임금수준은 떨어질 것이다. 그 안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그래도 우리네 후세에게 가르쳐야 할까?
그런데 창의적인 일자리는 점점 많이 필요해진다. 창의란 무엇일까. 남과 조금 다른 관점을 자신 있게 가질 수 있는 능력 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교육이 창의력을 떨어뜨리는 교육이라는 주장에는 ‘남과 조금 다른 관점’을 박살내고 ‘자신 있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을 경쟁으로 몰아넣어 불안감과 자신감 부족으로 연일 채찍질 하는데 주력한 시스템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런 것을 우리가 교육이라 부르는 이유는, 물론 국가의 경제 자체가 불안하던 초고속 산업화의 시대에 가장 중요하던 스피릿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땐 제법 성공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성공적일 것이란 가정은 위험하다.

개인적으론 미래가 두가지 방향으로 치닫아 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급격한 양극화의 진행으로 일종의 임계치를 뚫고 모두가 돈과 권력의 노예로 가는 길이 첫째이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그리는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형태 둘다 몰락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형태로든 극심한 스트레스의 시대가 될 것이고, 그런 시대는 지속되기 힘드므로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더 밝은 미래는 현재의 양극화가 다양한 미래지향적 기술로 인해 미국의 50~70년대처럼 희대의 골든 에이지를 맞이하는 방향이다. 부자들이 부를 미친듯이 긁어모으고 있지만, 인류 전체에까지 뿌려지는 신기술과 신세대와 신경제의 효과가 너무나 커서 오히려 양극화는 줄어드는 시대, 이런 시대가 바로 골든 에이지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분수령이나 다름 없다.
헌데 저런 trickle-down 효과를 양극화를 주도하는 세력에게 기대하는 건 자살행위다. 그들이 절대로 골든에이지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도면밀하게 신경써줄 것이기 때문이다. 신기술을 갖추고 신세대를 꿈꾸는 세력, 지금으로 치면 구글과 실리콘 밸리의 IT 기업들이 이끌어가는 트렌드와 기존의 (우리네 재벌 같은) 전주들의 소리 없는 전쟁이 될 것으로 본다.
어느쪽이든 급격한 시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경쟁력 있는 사람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확실한 건 그런 경쟁력이 국가가 초고속 산업화를 이루던 시대의 경쟁력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큰 변화에 적응하고, 자신의 비전과 재능을 가진 채 꿈을 그려갈 수 있는 사람이 어느 쪽이든 잘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이 현재의 교육인듯 교육 아닌 교육 같은 교육으로 갖춰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히려 역 교육이다.
어차피 어려운 시대에 위험한 도박이라면 상위 5억명들 속에서 같은 기술로 싸우는 방식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신나게 해보는 쪽이 유리하지 않을까. 고등학교 시절을 학벌 때문에 3년간 남들과 같이 공부하며 자신의 내적 열정을 삭이는 데 쓰는 것만큼 위험한 베팅이 있을까.

그런 저런 의미에서 우리의 교육 자체는 길을 잃었다. 지식의 함양도 기술의 습득도 이미 시대의 속도와 맞지 않아 ‘멘붕’이 온 상황인데, 기존의 패러다임을 버리기는 더더욱 힘들다. 마치 10년간 돈을 번 시스템이 4년간 돈을 깨먹고 있는데 전성기만 기다리는 시스템 트레이더 같다. 더군다나 자신의 자산이 아니기에, 고용만 지속된다면, 솔직히 어떤 미신을 믿든 상관 없지 않은가. 그게 현재의 교육이다. 이쯤에서 의무교육의 틀 자체를 해체해버려도, 학생들은 오히려 학원을 더 열심히 다니며 더 많은 공부를 할 것만 같은 생각마저 든다. 그만큼 수급이 명백한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짤린 교사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학원에 취업한다면, 학원료 자체가 오르기도 힘들겠지. 오히려 학원 보조금을 준다면 전반적인 교육의 질이 수배 이상 오를 수도 있는 상황일 것이다. 물론 국가의 장래를 걱정한다면 그래야겠지만, 공교육에 헌신하는 수많은 교사와 공무원들의 밥벌이를 생각하면 이런 주장은 사악한 주장일 것이다.

헌데 한가지 재미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칸 아카데미와 코세라등을 필두로 한 MOOC 이다. 사실상 세계최고의 교육 프로그램들이 인터넷으로 개방되고 있는 움직임이다. MIT 를 다니지 않아도 MIT 수업을 전부 들을 수 있고, 각자의 진도에 맞춰 충분한 교재를 충분히 해석해주어서 사실상 그 누구라도 그 어디에서보다 더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지식의 습득에서만 본다면 이런 교육 방법은 무조건 공교육에도 결부되어야 한다. 선생의 경쟁자가 아니라, 선생이라는 직업의 절대적 동반자가 될 트렌드인 것이다. 세계 최고의 강연들을 함께 들으며 선생들이 학생들과 ‘토론’을 벌이는 것에 훨씬 중요한 부가가치가 창출될 예정임을 그 누구도 반론할 수 없다.
달리 얘기하면 뛰어난 ‘토론’이 없는 교육 공간은 거의 무조건 인터넷으로 찾아서 공부하는 것만 못한 시대가 됐다. 공부만이 목적이라면 학교 자체를 폐쇄해야 하는 정당성이 더욱 커졌다.
이 엄청나게 다양하고 잘 짜여진 커리큘럼들의 풍요 속에서, 눈 앞에 보이는 교사, 교통지옥의 한 가운데에 몰려 있는 학원가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과연 목적이 무엇일까?
친구를 잘 사귀기 위해서?
그렇다면 공교육이 네트워크 프로그램으로 전환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자 여기까지가 현존하는 질서 내에서의 비판이다.

나의 교육론은 근래에 조금 바뀌었다.
뇌신경학의 근래의 경이로운 발전들을 보며 인간과 심지어 동물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우리의 뇌는 우선 손수건만한 기계이다. 뇌속 공간이 부족해지며 이 조직이 스스로를 구겨넣어놨을 뿐이다. 재미난 것은 뇌의 구간마다 모두 작동 방식이 동일하다는 점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동물실험에서 시신경을 잘라 청각을 담당하는 뇌에 연결해도 뇌가 시신경을 아무 무리 없이 처리한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달리 말하면 기능들이 배분은 되어 있지만 그 어떤 부분도 서로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작동 원리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럼 그 작동원리는 무엇일까.
전부 설명하기엔 부적절하겠지만, 여튼 수없이 많은 뇌세포들이 일종의 스위치 역할을 해서 다른 뇌세포들과 연결망을 만든다. 한개의 뇌세포는 수백개의 다른 뇌세포와 연결이 되어서 그들이 보내는 신호를 읽고 있다가, 자기가 맞다 싶은 특정한 시점에서 자기도 신호를 하나 보낸다. 연결되어 있는 다른 뇌세포들이 또 이런 신호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가 자기도 맞다 싶으면 또 신호를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자면 수천만개의 뇌세포들이 놀고 있다가, 특정한 뉴스를 받아들일 때에만 신호를 생산하는 경우가 많다. 소위 말하는 뇌의 5% 밖에 못 쓴다는 가설도 이런 구조에서 나온 오해이다. 이런 복잡한 신경 구조망을 neural network 라고 한다.
이런 구조의 이유는 ‘패턴’을 감지하기 위해서이다. 똑같은 현상이 반복되는지, 인과관계나 선후관계가 있지 않은지를 수억의 뉴런들이 대기하며 관찰을 하고 있는 방식이다. 뇌를 가진 우리들은 결국 ‘패턴 인식’적인 존재들이다. 애기가 부모의 행동을 하나 하나 보며 선후관계들을 익혀가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우리의 학습과정이 전부 이해가 된다 할 수 있다.
특정 뇌가 어떤 세계에서 어떤 물리현상을 겪던 상관 없이 그 안에서의 선후적 인과적 관계를 찾아내고 적응해낼 수 있는 것이 패턴인식적 뇌신경망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개들은 주인의 얼굴을 살피듯 인간은 주위환경을 보며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패턴들을 익혀가며 더 고난이도의 패턴들을 탐구해간다.
사람의 insight 라는 것은 결국, 복잡한 세상사의 정보와 노이즈들 속에서 나의 뇌가 아주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패턴을 찾아내어 내 뉴럴네트워크 속에서 하나의 path 랄까 신경망을 만들어내는데에 있다. 한번 찾은 패턴은 잊기가 쉽지가 않다. 여타 다른 정보들에서 수없이 발견할 수가 있으니까. 잘생긴 남자에 대한 패턴, 까칠한 여자에 대한 패턴, 거짓말 잘하는 사람의 표정에 대한 패턴, 비싼 물건에 대한 패턴, 좋은 학벌에 대한 패턴, 날씨에 대한 패턴, 내 기분에 대한 패턴, 역사적 패턴, 수학이 가지고 있는 패턴의 단순화에 대한 패턴,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패턴, 아름다운 그림의 패턴, 즐거운 게임속 패턴..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pattern-seeking 하나로 모든 것을 시작하고 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언이긴 하다만)

패턴 인식에도 자질이 있고 운도 있고 노력도 있을 것이다. 그런걸 환경이나 재능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헌데, 우리의 뇌는 편협한 정보를 많이 받아들이면 ‘과최적화’된 패턴 인식을 한다. 맥까페 선전에서 같은 맥까페에 2000원 / 4000원 짜리 표를 달아놓고 여성들에게 맛을 비교해달라고 하자 전부 4000원짜리가 맛있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이유는, 머릿속에 패턴에 대한 ‘모델’ 이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편협한 패턴을 일정 이상 접하자 그에 대한 모델이 착실하게 자리잡았고, 그 모델을 배반하는 패턴들은 인지적으로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역교육이다.
역사 교육이니 가치관의 교육이 너무 어릴적에 이뤄져서는 안되는 이유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맹목이고 교조이고, 곧 종교적 믿음으로 자신의 인지적 모델이 망가지는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교육은 무엇일까?
다양한 패턴을 보고, 다양한 모델을 만들어가며 더 깊고 일관적이고 보편적인 모델, 즉 insight 들을 삶에서 얻어가는 것이 아닐까?
패턴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너무 빨라도 안되고 정보가 너무 지저분해도 안된다. 흡수하기 좋은 수준의 패턴을 보여주는데에 집중해야 한다. 그 이후에는 그 다음 수준의 재미난 패턴을 알만한 다양성을 공급해줘야 한다. 여러 관점에서 보면 관점이 넓어진다, 뻔한 얘기다. 헌데 인지과학적으로 보면 상쾌하게 풀리는 명제 아닌가 싶다.
즉, 적당히 다양한 관점을 열정적으로 살펴보며 자신의 세상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나는 궁극적으로 교육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의 습득은 그 아주 일부분일 뿐이고, 기계적인 기술의 습득 역시 패턴 인식의 좋은 결과물이지만 한면일 뿐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나라 교육이 오늘은 미분을 공부하고 내일은 역사를 외우고 모레는 영단어를 암기해야 하는데, 이것이 옳바른 교육이랄 수 있을까? 그 역시도 패턴인식을 잘하는 학생들에게 유리한 것임에는 마찬가지이겠지만, 전체 학생의 모델링 능력을 키우는데에는 사실 가장 저급하고 비효율적인 방법이 아닐까.

긴 글 읽느라 고맙다. 나도 쓰느라 힘들다. 앞으론 블로그를 만들 참이다…

첨언

교육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 했었는데, 여러 경험을 다양하게 하며 간접 체험을 많이 하고 그 안에서 고민을 해보며 세상에 대한 프레임을 잡아가고 그 안에 수백만가지의 삶의 방식과 이해의 방식이 녹아 있음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대충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해가는 점차 큰 패턴 모델링이 인사이트라는 점을, 그래서 지식의 습득이나 기술적 습득으로는 부족한 것이 인간을 키워내는 방식이라고 논했다. 그러니깐 사실 논조 자체는 우리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모든 좋은 ‘의미’들을 집대성한 느낌이다. 다만 그들이 ‘왜’ 그렇게 해야 하나를 반대입장의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직관적이고 심미적인 인사이트라 소위 ‘아는 사람만 알아먹는 얘기’였다면, 이제 우리의 위대한 스승들에게 뇌의 구조라는 명쾌한 설명 방식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이런 얘기를 가볍게 ‘좋은 얘기’로 넘겨 짚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 같다.
좀 더 극단적으로 지식과 간접경험 둘 중 하나를 접해야 하는 상황에 우리에겐 일종의 일관적 모델이 생겼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즉, 교과서에 정리된 매우 일반화되고 모호한 핵심 사항들을 외우고 머리속에 받아들이는데 시간을 쓸 것이냐, 아니면 만화책을 볼 것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한 중학생 아들을 뒀다고 해보자.
이전 같았으면 사실은 모델링에서는 클래식을 먼저 배우는게 도움이 되고 그게 경전들처럼 니 안에 견고하고 도덕적인 모델을 제시해주는 것이 교육의 최상의 덕이었을 것 같다. 물론 일반 교과서는 이 레벨도 아니다만. 그러나 경험상으로는 만화책도 나쁘지 않지, 관점이 넓어지니까, 정도였달까.

그런데 나는 이렇게 권하고 싶다. 무조건 만화책을 읽히라고. 남의 생생한 이야기, 남이 수많은 인터뷰나 상상력을 통해 짜낸 새로운 세계, 그 주인공들이 바라보는 세계관 그리고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관을 통해 세계의 한 이면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이라고. 그것이 곧 교육의 시작이자 목표이자 끝이라고 말하고 싶다. 공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존재한다. 격물치지라는 말이다.
그것을 매우 간단하게 액자화해둔 것이 교과서이다. 그 교과서의 내용이 중요한 것임은 맞으나 그 것을 나의 것으로 이해하는데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또 수천만가지의 다른 모듈이 필요하다. 그 모듈들의 개발을 무시한 채 교과서에 집중하라는 건 인간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일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의 컨택스트들이 왜 중요한지를 다채로운 관점에서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툴은 뇌의 mirroring 이다. 우리는 우리가 관찰하는 사람처럼 자기도 모르게 표정을 짓고 거울처럼 동일화하는 습관이 있다. 관계가 강해지면 그 사람의 고통과 행복마저도 동일한 수준으로 느낀다. 과학이 밝혀낸 연구 결과들이다.
많은 미러링을 위해서는 좋은 부모와의 많은 대화가 장기적으로는 가장 좋겠지만 그게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좋은 선생과의 대화도 좋지만 역시 세대가 틀려서 모든 모듈을 물려주고 가르쳐줄 수 있는 선생은 없다. 뛰어난 리더쉽을 가진 친구, 많은 정을 나눈 친구의 관점이 가장 큰 도움이 되고, 동네 형과 언니들의 영향이 그야말로 지대하다. 그리고 나서는 누굴까. 드라마 속의 세상을 닮길 원하는가? 나는 소설이나 만화책이야 말로 사람이 세계관을 익혀가는데 가장 빠르고 좋은 길 같다. RPG 게임도 괜찮고, MMORPG 도 괜찮다. 허구한날 게임만 하고 있어도 괜찮다. 자기가 이해하고 싶은 수준과 단계까지 이해하고 싶어서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 세계에만 너무 빠지면 위험하다는 점에서 물론 게임과 만화는 좀 다르다. 만화는 중독되면 다독을 하게 된다. 엄청나게 많은 내용을 접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그리고 더 높은 퀄리티의 문학성과 예술성을 찾아 헤매게 된다. 그런 취미를 둔 적 있는가? 맞다. 전형적으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인격을 고양시켜주는 취미들이 그렇다.
다만 요 근래의 왜색 짙은 오타쿠 문화는 만화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일본이 저성장 시대에 겪은 독특한 사회적 문제가 특유의 디테일과 만나 뭐라 설명하기 힘든 하나의 장르를 창출했는데, 자세히 보면 건전한 매니아라는 것도 많다. 애당초 ‘매니아’라는 건 대개 건전하다. 오타쿠가 매니아의 한 변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현재 우리가 받아들이는 교육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리란 생각이 든다. 헌데 재밌는 방식으로, 아이들이 세상을 흡수해가며 관점을 넓히고 깊이를 익히는 방법이 존재한다.
그리고, 별 의미 없는 차가운 단어들로 세상을 아슬아슬한 정치적 균형으로 정리해둔 교과서라는게 있다. 어느 쪽이 인간을 만들어내는 방법인지 그걸 꼭 관습에 물어야 할까 싶다. 우리 나이는 특히, 가슴에 물으면 모든 답이 명명백백히 흘러 나오는, 다시 말해 사회의 관습을 바꿔야 할 나이이다. 우리 안에, 관습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는 나이, 30대 중반이니까.

근데 나는 교육 전문가가 아닌데. 그냥 30대 중반이니까 권리가 아닌 의무로서 나의 목소리를 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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