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그만둔 인사

Julius Chun – 담벼락 2014년 12월 27일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회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휴가 6일째, 날짜로는 10일째네요.
사업을 하겠다고 나왔지만, 저는 여전히 피고용인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고용했으니까, 저는 월급쟁이 TFT 팀장입니다. 투자자 천영록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습니다.
이런 자아 분열의 구조가 제 성격엔 제법 잘 먹히네요. 매일 출근하여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사업하면 어렵겠다, 라고들 하시지만, 저는 모든 경제 활동은 일종의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있어도, 누군가의 사업을 도와주고 있는 입장이긴 마찬가지죠. 그 조직구조가 복잡하고 거대하다 해서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주 큰 사업에서 아주 작은 일부를 도와주고 있는 격이지만, 여전히 사업을 하는 것과 다름 없지요. 다만, 제가 주도적으로 사업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차이인데요. 페이스북의 100번째 멤버가 2000억을 벌었다고 하니깐, 굳이 어디서엔가 첫번째 멤버여야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구글의 1500번째 멤버가 구글 지도를 만들어 전세계인의 일상을 변화시켜주었으니 굳이 돈을 떠나서 업적만으로 봐도 어느 회사의 첫번째 멤버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애요.
결국 내가 대주주인 사업이고 아니고는 의미 없고, 차라리 남 밑에 일할 때 내 일이다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일찍이 깨달았어야 할 현실인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지금처럼 가슴이 뛰고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쥐어짜며, 넓고 멀리 보는 동시에 좁고 짧게 일을 해결하는 집중력을, 종업원일 때는 전혀 해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단지 마음먹기의 차이일 뿐인데, 젊은 날 제법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던게 한심합니다.
사람은 정말,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그 심기가 창이 되기도 하고 총이 되기도 하고 똥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백수라고 생각하면, 휴가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서 없는 피로를 짜내서라도 더 쉬려고 했을텐데. 이제야 어떻게 일을 해야하는지를 조금 깨달은 것도 같습니다.
언제 회사를 떠나는게 맞느냐는 질문에 Paul Graham 은 you will know 라고 하더군요. 그거 였던 것 같습니다. 후배들에게 이상한 관념을 줄까 걱정이 되지만, 그 시기가 오면 스스로 알게 되더군요. 신내림을 받은 듯, 설명할 수 없는 동기로 떠나야만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회사가 싫어서도, 변덕도, 충동도 아닌, 두려움도 탐욕도 아닌, 뭔가를 해야할 시기임을 은혜 받은 종교인처럼 느끼더군요. 그리고 우습지만 작은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그 길을 따라간다고 해서 영원한 번영이나 행복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모세의 삶은 고생의 연속이었는데, 단지 그걸 해야된다는 의식이 일어났을 뿐이지 않을까요.
6년반을 증권가에 있었습니다. 5년을 선물옵션 운용을 했고, 법인 브로커와 자산운용을 조금 하기도 했습니다. 잘난 맛에 산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 6년반이 제 자신의 어리석음과 모자람을 깨우치는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잘난 맛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깨부숴야 하는 아픔을 정면으로 뚫고 가라고 신이 젊은이들에게 주는 마음의 위로 같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한해 한해 지나가며, 그런 잘난 맛이 전혀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잘나지 않음을 깨달아 가며 더이상 못난 내 자신을 인정하는게 두렵지 않아졌기 때문에, 무모한 용기와 기백은 가는 길 어디에 스르르 흘려 놓을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더 용감해진 것 같습니다. 뭔가 업적이 있어서 그것을 믿고 자신감을 복돋아 줘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면 항상 결과는 나온다는, 인생의 단순한 방정식을 오래동안 복습해와서 마음으로 외우기 때문일 겁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모자란 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아는 것들을, 지금의 정신상태를, 20대 초반에 깨달은 사람들이 얼마나 수두룩했는지 생각하면 얼굴이 벌개집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내 길은 내가 가는 길일 뿐, 늦든 빠르든 여기까지 왔으니 행복합니다. 누군가 보다 뽐내거나, 누군가를 샘내거나, 그런 감정들로 이뤄지는 세상에 사직서를 낸 기분도 듭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을 찾아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을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아서, 어른이 된 것도 같습니다. 그간 배운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첫번째 사수에게 시장을 배웠고, 법인영업 본부장님께 이 산업을 배웠습니다. 마지막 사수한테 인생을 어떻게 살지를 배웠구요.
그간 저와 인연을 맺어주신 샐 수 없이 많은 분들께 다 찾아가 감사드릴 수는 없지만 제 뜨거운 마음을 보내고 싶습니다. 한분 한분의 큰 의미 없는 과대평가가 저에게 용기를 주고 복돋와주었습니다. 저를 있게 해주었지요. 평생 연락이 닿을 친구들도 하나하나 생각이 납니다. 저에겐 한국에 들어온 이후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공간이 여의도가 아니었나 합니다. 그리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손잡고 춤추며 놀아준, 대한민국 파생시장. 나를 잠못들게 괴롭게 하고 나를 잠못들게 흥분하게 하고, 나에게 월급을 주고 작은 군자금을 마련해주고 내 자식을 키워준 텃밭. 나에게 인생에서의 리스크를 가르쳐주고, 내 자신을 돌아볼 한결 같은 거울이 되어주고, 나의 도를 찾아가는 지침서가 되어준 비옥했던 텃밭. 우리는 여러 인연으로 어디선가 다시 만날 것 같지만, 지금은 내 손으로 너를 두들길 일은 한동안 없을 것만 같구나. 나는 사람을 만나러, 세상을 향하러 떠난다. 1월 부터 새로운 모습으로 많은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글쓴이

julius chun

안녕하세요 천영록입니다. 저는 두 아이의 아빠이자, 핀테크 스타트업 (주)두물머리를 창업한 기업가입니다. 또한 선물옵션 트레이더 출신이라 투자나 금융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읽어주셔서 늘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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