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통한 인권을 통한 진화를 위한

여성 혐오에 의한 폭력이 이슈가 되고 있다. 간단한 답으로 논할 일은 아니다. 수백가지 인자들이 서로 거미줄처럼 뒤엉켜 있어 한큐에 풀 수 있는 초월적 거미집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 그 줄 위에 안착한 존재들이니까, 한 올씩 풀어가야만 한다고 느껴진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외부자로서 페미니즘과 엮어 우리에 관한 얘기를 좀 하고 싶다.

 

우선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잘못된 프레이밍인 것 같아 아주 아쉬운 부분이다. 흑인인권을 옹호하는 단체를 blackism 이라고 부른다면 흑인주의자처럼 들릴 것이다. 흑인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그들을 방어하기 위한 관념 같이 들려버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여성주의자, 여성우월주의자, 여성중심주의자라는 프레이밍을 이끄는 것은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Woman rights movement, 여성인권운동이라는 표현이 훨씬 자리 잡혀야 하는 것 아닐까한다.

 

여성인권운동이 때로 여성과 남성의 투쟁의 형태를 강조하는 것이 아쉽다. 한쪽을 가해자로 명시하고 한쪽을 피해자로 명시하면, 한쪽을 남의 편으로 한쪽을 우리 편으로 명시하면, 피해자들은 속이 시원하겠지만 가해자들은 역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절반의 팬과 절반의 안티를 창조해내는 전략이다. 분리주의의 프레임이다. 뿐이랴 여성들은 전반적으로 남성에 비해 분쟁을 싫어하고 평화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투쟁의 프레임이 여성들에게도 받아들여지기 힘들어 좀처럼 효율이 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남과 여는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게 만들어져있다. 상식적으로 일정 이상의 투쟁대상으로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것이다. 나쁜 전략이다. 주요 이슈들이 매번 임계점을 넘지 못하고 녹아버리는 본질적인 이유가 프레이밍의 실패에서 왔다고도 생각한다 (전략 입장에서).

 

여성인권의 문제는 단지 편가르기로 끝나서는 안된다. 더 크게 봐서는 약자와 강자에 대한 인류의 본능의 문제이고, 그 결과가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되어버린 이 현상에 대한 고찰이 되어야 한다. 즉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 어머니, 누이, 딸에 관한 문제이고, 더 나아가 남성으로서의 인간성과, 또 남성으로서도 일상적으로 겪고 또 배출하는 모든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여성으로서는 이에 대해 자유롭냐 하면 대다수의 폭력을 남성과 함께 공유하며 겪고 또 배출해가고 있다. 그 얼레가 결국 남녀의 권력 차이로 많이 나타나고 있고, 그것이 우리가 해결해야할 가장 급한 문제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고로 남자는 힘이 좋고 여자는 더 존중받아야 돼 같은 모호한 표현만으로는 이 문제의 핵심이 공중을 맴돌 뿐인 것 같다. 인권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분명히 적시해야 한다.

 

사람은 본성에 폭력이 존재한다. 애를 키워본 사람은 알고, 또 어릴적의 기억들에서도 그 단서들을 자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보다 약한자의 팔을 비틀어보고 싶었던 욕구는 인간이라면 수천번씩을 느끼며 성장하는 감정이다. 마치 개나 고양이가 도망치는 물체를 보면 쫓아가 괴롭히듯, 광기에 가까운 폭력성이 생존본능으로 존재한다. 마치 잊은 척 할 뿐이다. 이런 점은 동물과 같다. 그럼 인간은 짐승보다 못한 면이 있을까? 짐승은 암컷을 괴롭히지 않는가? 놀랍게도 침팬지만 해도 엄청난 암수의 권력차이가 존재하여 지켜보기 딱할 정도로 정치적이고 폭력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인간이 본격 짐승만 못한 것은 아니다. 모든 짐승과 같은, 약자에 대한 폭력성이 있는 것이다. 문제를 정확히 하자. ‘우리는 다른 짐승과 달리 이런 폭력적 본능을 이겨내야 하는 것일까’ 그 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론들의 핵심은 대개 한가지 관념으로 이어진다. ‘이런 강자의 폭력이 자연스럽지 아니한가’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그에 대한 반론은 어지럽다. ‘그렇게 말하는 놈이 나쁜놈이다’ ‘원래 이렇지 않았다’ ‘니넨 감정도 없냐’ ‘찌질이들’ ‘여자가 원래 더 잘났다’ ‘여자는 약해서 아껴줘야 한다’ ‘여자는 강하다 싸우자’… ‘우리는 평등해야 한다’. 모두 동문서답이고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이분법들의 파생관념들이다. 그래서 진정성 있는 페미니즘 관념들이 더 묻힌다. 내부의 메시지가 응집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봤다. 심한 경우 ‘남자 따위가 감히?’ 라며 종교재판을 하는 경우도 봤다. 같은 여자들마저도 페미니스트를 꺼리게 만드는 폭력적 모순은 전파력이 없다.

 

‘이런 강자의 폭력이 자연스러운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내야 한다’ 는 프레이밍이 되어야 대중들이 어느 쪽에 붙을지 명료한 선택권이 생기는 것 아닐까.

 

우리가 강자에게 시달리는 감정과 현상은 비단 남녀간의 문제뿐이 아니다. 수십 수백가지 차원으로 나뉜 계급간의 폭력; 외모에 대한 폭력적 사고, 학벌에 대한, 집안에 대한, 재능에 대한, 성격에 대한, 지역에 대한, 단순한 우발에 의한, 또 종에 대한 폭력으로 이 사회가 지탱되어 있다 시피 하다. 그 중 특정한 한가지 폭력을 꼬집어 내는 것은 허망하다. 만가지 폭력 중에 유난히 한가지만을 제거한다해서 큰 변화가 올 것 같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역으로, 모든 종류의 폭력은 모든 다른 종류의 폭력을 부른다. 모든 폭력은 서로 친인척간이다. 원인은 폭력성이고, 결과가 사회적 사건들이고 특정 계층에 대한 혐오감이다. 특정 혐오감만을 수술해서 적출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그 중 가장 광범위하게 학습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가히 만폭력의 중심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적출해내기엔 가장 쉬운 것 중 하나가 된 셈이다. 무용론은 변화의 적이다. 모든 폭력이 다른 폭력들을 불러 일으킨다는 면에서 가장 시급한 이슈로서 인지해야 한다고 본다.

 

왜 우리는 폭력을 제거해야 할까. 우리는 영겁의 세월 동안 폭력성, 그리고 육체적 강인함을 중심으로 진화해왔잖은가. 폭력성을 전부 제거한다면 우리는 어떤 종이 될지 종잡을 수가 없다. 어쩌면 스포츠도, 경쟁도 전부 사라질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약자를 괴롭히듯, 지금 ‘할 수 있기 때문에’ 폭력을 뛰어넘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본다. 종으로서의 앞으로의 진화는 분명 폭력이 아닌 지혜가 되어야할 것이다. 이런 시대에 가짢은 힘 따위가 무슨 소용이람. 사람의 능력으로 사람의 힘의 수백 수천 수만배의 기계들을 만들고 조종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의 경제적 가치들을 일상적으로 만들며 살고 있다. 굳이 일차원적인 폭력으로 후퇴해야 하는가. 힘이 가장 쎈 상위 1%의 사람에게 재산을 몰아주는 시대에서, 지혜가 뛰어난 상위 대다수의 사람에게 보상을 주어 더 쾌적하게 진화해가는 사회로 전이해갈 수는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모두에게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줄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질문이 가장 시급하다. 하나만 적출해서 허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후임을 때린 사람은, 사람을 때려도 큰 탈이 없다는 걸 학습하고, 후배도 때려보고, 여자도 때려보고, 아내도 때려보고, 부모도 때려보고, 아이도 때려보고, 조직적으로 그런 행위를 더 전이시키고 장려한다. 그 뿐이다. 그 사람은 자기합리화로 인해 멈출 수가 없다. 자꾸 자꾸 더 장려해야 본인이 정당화 된다. 눈치보다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계속 도전하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볼 것이다. 그 와중에 여성이 잘못 걸린 것이니, 전부 우연이고 일부일 뿐이라고 쉴드를 치기엔 그 짜임새가 너무 촘촘하다.

 

결국 비폭력이 핵심에 서야 한다. 모든 종류의 폭력의 전이를 멈추는 촘촘한 그물을 짜야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폭력성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가 우리 중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게 법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법이라는 망을 통해서 강한 폭력을 폭력자에게 가하여, 마치 기계가 행하는 절대 폭력처럼 ‘이건 개인적인 감정이나 폭력이 아니야’ 라며 타자화 해내는 방법을 지난 수천년간 써왔다. 폭력을 더 부추기지 않고도 본능적인 폭력을 눌러주는 강한 억제력이 있었다. 그런게 혹시 인간을 아예 초월한 인공지능의 법망을 통해 사람에게 가한다면 사람은 더 차분해질까? 위험한 발상이다. 그렇게 불가피한 새장 속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선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게임을 통해서 가벼운 폭력성을 재미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정의 능력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추가로 한가지 이야기를 더 붙이자면, 남자들은 여자가 겪는 고초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있다. 남자 100명 중 5명이 여자를 추행한다고 해보자. 남자들의 눈에는 그런 남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 추행범들은 특히나 남자의 눈을 피해 다니니까. 그렇지만 그 5명이 일년내내 200번씩 추행을 하고 다닌다면 (그렇지 않겠는가) 여자들은 어쩔 수 없이 100명 모두가 평균적으로 일년에 한번씩 추행을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실제 통계는 이것보다 훨씬 높은게 문제다. 그렇다면 남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여자의 세계에서는 매우 실재하는 폭력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남자 전체의 문제가 아닌 것인가, 아니면 정말 남자들의 이미지를 구기는 통분할 문제인가. 또한 그 5명이 그러고 다닐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는 정녕 우리가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할 문제가 아닌 것인가. 나머지 95명이 조금씩 더 불필요한 권력을 박탈당함으로써 나머지 5명이 추행할 기회를 잃는다면 이것은 우리 95명의 승리가 아닌가. 우리가 승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 없다. 95명이 도매급으로 그 놈들과 같은 놈 취급을 당한다는 것은, 취급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취급당하는 사람들이 더 화날 문제다.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있다면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책임감을 발휘할 일이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술자리에서 여성 비하 혹은 여성을 가지고 장난쳤다는 자랑질을 하는 친구놈을 기습적으로 싸대기를 때리는 데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아 요즘 시대에 이런 소리 지껄이면 싸대기 맞는 구나 라는 걸 배우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생각이 많이 바뀐다. 물론 그 친구는 우락부락 화내며 별 이상한 놈이네라며 멱살 잡고 항변하겠지. 그렇지만 그런게 한번 두번 반복되다 보면 주위 다른 친구들도 그만하라며 서로 서로 눈치를 주게 될 것이고, 그런게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글이 폭력적으로 끝나서 좀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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