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정신과 묘기의 영역, 그리고 두려움

장인정신. 열정과 환경으로 속박된 한 사람이 상상을 불허하는 세월을 녹여낸 일련의 정제된 경지를 말하는 것 같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그 자체에 삶의 모든 의미를 던진 사람만이 보고 느끼고 제조할 수 있는, 사람을 숙연케 하는 경지가 아닐까 한다. 장인정신. 그 흔적들을 볼 때마다 전율과 경이에 빠진다. 사물의 위대함 보다 인간의 위대함과 그 열정의 기이함에 탄복하는 것 아닐까. 누군가에게 그토록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나에게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설득에 휩쌓여 가는 것이다.

장인정신에는 한가지 일을 끝없이 반복연마하여 더 뺄 것이 없는 경지에 오른다는 인상이 있다. 장인이 사물을 수천 수만번 만들어내는 과정속에서 수많은 변인들을 이해하고 통제하여 잔기술을 정제하고 함축한 영역. 군더더기를 빼고 노력과 정성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길 반복하는 혼. 그것이 장인정신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숙연함의 정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장인정신에 녹아있지만 때론 대립되기도 하는 개념이 하나 있다. 정신과는 다소 대립되는, 기예의 영역이다. 나는 기예의 끝에 묘기의 경지가 있다고 하고 싶다.

장인과 묘기의 경지는 비슷하지만 본질이 아주 사소하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인 중에 기예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묘기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모두 장인정신이 있을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장인들이 일반인의 눈에는 묘기를 부리는 것으로 보일테다. 묘기는 장인에게 쌓여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론 의도적으로 배척하기도, 의도적으로 추구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흔한 사례들이 있다. 기존에 있던 기술들을 장인의 경지로 가다듬어 성적을 내는 스포츠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그 이상으로 창의적인 기술을 선보이고 눈을 의심케 하는 움직임을 연구하는 선수들도 있다. 두 선수 층은 때론 겹치지만 때론 정신세계가 달라 보였다. 기술자 중에도 일을 처리하는 공정에 있어 장인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이 있고, 업무 관련한 모든 사소한 영역에서도 묘기에 가까운 영역에 다다르는 사람들이 있다.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일까. 같은 카드를 가지고도 밑장빼기를 신의 경지로 연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백가지 카드마술을 만들어내고 현란하게 기술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 장인과 묘기의 미세한 경계선.

장인의 쪽이 정제와 숙련에 집중하여 엄숙하고 숙연한 느낌을 준다면, 묘기의 영역은 탄성을 자아내도록 끼를 발산하고 상상력을 발산 시킨다. 빚어내는 것과, 펼쳐내는 것의 차이일까. 창의력을 개방하고 더 도전하는 것과 루틴에 집중하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도 싶다.

어릴적부터 묘기에 흥미를 느꼈다. 신체적인 묘기든, 정신적인 묘기든, 감히 상상의 영역을 넘어서는 깊이에 반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런 묘기에 도전할 자신감이 점점 없어진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10대에는 마이클 조던을 보며, 좋아하는 가수나 기타리스트를 보며, 노력만으로 저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패기가 속에서 끓어올랐다. 재능과 환경을 초월해 나의 의지로 저기에 이르고야 말겠단 의욕이 샘솟았다. 순수하기 때문에 열정이 있었다는 흔한 표현 그대로일까. 30대가 지나니 마음속에 두려움이 더 많다. 요요를 예술의 경지로 돌리는 아이들, 자전거로 협곡을 질주하는 사람들, 오토바이로 공중에서 3~4바퀴를 회전하는 사람들, 그림을 사진보다 정교하게 그리는 사람들, 드론 레이싱을 하는 사람들, 로봇을 만들어 배틀 대회에 나가는 사람들, 카드 마술, 나는 이런 묘기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을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가슴속에 불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새는 그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쌓은 시간과, 열정과, 재능의 무게를 다소 잘 알기 때문에 가슴속에 묵직한 두려움이 먼저 일어난다. ‘나는 못할 거 같은데.’ ‘그 흔한 스타크래프트에서도 일정한 영역에 오르지 못하더만, 그 많은 변수들을 예술적으로 통제하며 기예를 펼칠 재량이 있기는 할까.’ 이런 생각들이다. 몸으로 하는 건 잘 못해도 머리로 하는 건 잘해보고 싶지만 그마저 자신감이 없다. 머릿속에 ‘내가 못하는 것’의 선을 긋기 시작하고 감히 도전해보지 못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누군가는 이걸 ‘현실적이 된거지’ 라고 할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은 내 마음 속에서 발하는, 주관적인 것일 뿐이다. 도전할 용기가 없어진 것이 더 맞는 표현이다, 그 기제야 어떻든, 결과이자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용기’의 감소이다. 용기는 도전하지 않을 때마다 줄어든다. 그리고 용기가 적어질수록 도전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그때부터 머릿속의 ‘과대 자기합리화’ 공장이 작업을 시작한다. ‘난 어차피 저렇게 될 수 없는게 현실이야, 현실이라고, 누가 뭐래도 현실이니까, 어린애도 아니고 현실을 직시해야지’.

내가 묘기의 영역에 다다르고 싶은 부분은 사실 요요도 오토바이도 드론조종도 아니다. 내가 하는 한가지 일에, 적당히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묘기의 영역으로 잘하고 싶다. 트레이딩도 기예의 영역이 없잖아 있었지만 나는 장인정신에 만족한 것 같았다. 조금 더 자신을 밀어붙여 인간 영역의 한계를 탐험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 돌아보면 아쉽다. 스스로 이 정도면 마치 묘기 같은걸, 이라 생각한 순간들이 있었음에도 끝까지 따라가지 못했다. 머릿속에 일종의 잠금장치가 있었던 것 같다. 밥벌이가 신통해지자 그 자리를 꾸준히 지키는 것에 유혹을 느꼈다. 그게 어쩌면 장인들이 묘기의 영역을 포기하는 계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매일 매일 한단계 더 깊어지는 격렬한 욕구를 느끼느냐, 아니면 끊어내느냐의 문제인 것 아닐까.

창업을 하는 중이다 보니 묘기를 추구할 일이 없다, 고 느껴갔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을까. 모든 일에 묘기가의 집념으로 도전하지 않으면 어떤 일에 만족할 성취를 내기 어려울 것 같다. 유재석도 장인이며, 이승환도 장인이며, 손정의도 장인이며, 이렇게 세상에 우뚝 선 사람들은 모두 순백의 장인정신을 토대로, 스스로의 정신적 한계에 매일 도전하는 묘기가의 삶을 살지 않는가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일에 묘기의 영역에 달하고 싶다. 불리오를 쓰는 사람들이 봤을 때, 이것을 만든 사람들이 묘기의 영역에 달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서비스의 기예, 서비스의 묘기가 있을 것이다. 상상의 폭을 초월하여 유저들의 입을 벌어지게 하는 수고를 투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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