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8 (번트)

잽은 복싱에서 쓰는 용어다. 타격의 묵직함은 없지만 빠른 펀치로 거리를 재거나 타격을 누적시킬 수 있다. 그에 반대되는 개념은 풀스윙 펀치가 아니겠는가.

둘 간의 차이는 리스크의 차이다. 잽은 리스크가 거의 없다. 대신 얻는 것도 많지 않다. 풀스윙 펀치는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빈틈이 생기지만, 역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있다. 잽을 날려야 할 때와 풀스윙을 해야 할 때가 당연히 시시각각 다르겠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얻어맞고 있어 기세에 눌릴 때 무모한 풀스윙으로 역전을 노리지 말 것. 이것이 트레이딩이나 투자에선 ‘자금관리’라 불리는, 어쩌면 성공에 필요한 가장 핵심적 요소이다.

자금관리는 기본적으로 지고 있을 때 공격성을 줄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이기고 있을 때 공격성을 줄이라는 이야기일 수 있다. 삼국지 등에 나오는 고대 전투에서 한쪽이 승기를 잡아 추격을 시작할 때 ‘너무 깊이 추격하지 마십사’라는 참모들의 조언을 많이 읽어보았을 것이다. 이길 만큼 이겼으면 행여나 지리적 이점이 없는, 혹은 지리적 정보가 없는, 혹은 후방 부대의 매복이나 아군의 피로나 진열의 붕괴로 인해 생각지 못한 변수가 발생할 수 있는 구간까지 과욕을 부려 추격하다간 불필요한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한편으로 자금관리는 기회가 보일 때 풀스윙을 날리라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풀스윙은 정말 미묘한 부분이어서 각자 알아서 판단하시길 바란다. 장수의 본능으로 천재일우의 기회라 판단이 든다면 적군을 밤새 가차 없이 짓밟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투자나 투기의 세계에서 풀스윙을 지를 용기나 결단성이 없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개는 풀스윙을 너무 자주 너무 무분별하게 질러서 문제다. 그래서 오늘 할 얘기는 기본적으로 풀스윙을 줄이는 절제력에 대한 이야기다.

‘자금관리가 필요하다’는 표현은 짧은 현업 시절에 최소한 천 번 이상 대화를 나눈 주제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또 그 제자가 자신의 제자에게 끝없이 각인시키는 이야기다. ‘자금관리가 필요한 건 뭐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하지만 코치가 선수들에게 매일 매일 강조하는 요지가 있다면, 그것이 그만큼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일 것이다. 농구 코치가 ‘디펜스’를 외치고, ‘리바운드’를 외치는 것은 그런 작은 행동이 어쩌면 승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니셜D 라는 레이싱 만화에도 이런 비슷한 말이 나온다: 승부가 결정 나는 곳은 직진코스도 코너도 아닌 그사이 구간이라고 말이다. 승부처로 보이는 곳이 사실은 승부처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 사이를 흐르는 유유한 어떤 지점, 추상화시키기 힘든 어떤 영역에서 미세한 차이의 누적이 승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다 아는 얘기라 생각해도 한번 진지하게 읽어주시길 바란다.

자금관리의 묘에 대해서 나 역시 아직도 묘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심법이라 하나 보다. 슬램덩크에 나오는 ‘바람이 한번은 바뀐다’는 개념으로 생각해도 좋다. 될 때는 뭘 해도 되는 구간이 있다. 그렇지 않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가 자금관리의 전부다. 소위 패배하는 법, 패배를 극복하는 법인 셈이다. 또한, 심법이 아닌 순수히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측면도 있다.

수학적인 면부터 예를 들어보자. NBA에서 한 팀이 10점 차이로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3점 슛을 남발한다고 해보자. 3점 슛을 던질 때마다 확률은 비슷하다고 할지언정, 만약 3점 슛을 실패한다면 겪게 되는 손실의 차이는 존재한다. 한번 실패할 때마다 승리할 가능성은 비대칭으로 줄어들 것이다. 상대방이 역공하여 안전하게 2점 슛을 성공만 시켜도 이미 12점 차이가 되어 버린다. 갈수록 더 위험한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요행이 없다면 패배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반면 10점 이상 이기고 있는 팀 입장에선 얘기가 조금 다르다. 승기를 확고히 하기 위해 3점 슛을 던졌는데 실패하면 여전히 10점 차이다. 상대방이 공격에 성공한다고 해도 7~8점의 승기를 유지할 수 있다. 승리의 확률엔 큰 차이가 없었으므로, 큰 손실이 없는 것이다. 소위 오차 한계, margin of error가 크다. 반면 3점을 성공시키면 13점 차이로 승부를 크게 갈라놓을 수 있다. 향후 더욱 공격적인 플레이를 많이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특히 7점 차이와 10점 차이는 큰 차이가 없지만, 10점 차이와 13점 차이는 결정적인 차이가 되는 경우를 비대칭적 수익 구조라 한다. 패색이 짙은 팀에겐 이러한 비대칭적 이점이 없다 못해 역으로 발생한다.

양 팀이 접근해야 하는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지고 있는 팀은 점수가 적더라도 가장 자신 있는 플레이를 해야 한다. 패스를 통해 공간을 확보하고, 아주 쉬운 레이업을 하나씩 성공시켜 나가는 것이다. 단숨에 승기를 잡을 순 없겠지만, 한 발 더 벌어지는 상황을 최대한 방지해야 한다. 상대방의 실수를 기다리면서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또한, 3점 슛이 들어갈 정도의 컨디션이었다면 2점 슛은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컨디션이나 자신감이 있다면 더 확실한 전술을 다져가야 한다.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 싸움일수록 이 점은 명료하다.

여기서 심리가 들어간다. 이미 지고 있는 팀은 심리적으로 쫓기게 된다. 넣을 슛도 못 넣을 가능성이 높다. 충분히 컨디션이 좋았다면 애당초에 이미 이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기에 승부에서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고, 상대방도 알고, 또한 관중도 알기 때문에, 기세에 눌리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여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강한 패기로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렇지만 이겨낼 수 있다면, 2점부터 차근차근 점수를 쌓으며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렵지 않은 슛을 성공시키며 자신감을 올려야만 기세를 역전시킬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어려운 슛을 던지다가 행여라도 실패하면 자신감은 훨씬 위축되게 마련이다.

이런 것이 모든 프로의 game plan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주눅이 들면 번트를 쳐야 하고, 복싱이 안 될 땐 잽을 날려야 하고, 골프가 꼬일 땐 짧은 채로 거리를 포기하고 쳐야 하며, 당구가 꼬이면 가야시를 생각지 않아야 하고, 전투에서 패색이 짙을 땐 돌진하면 안 된다. 이미 작전에서 밀리고 있을 때 만용을 부리다가는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을 뿐이다.

모든 스포츠 모든 승부에서 뻔한 이야기다. 다만 투자를 하는 사람들만이 희한하게 만용을 생활화한다. 아니지, 어쩌면 모든 분야의 초짜들은 만용을 부리지만, 투자의 세계에선 유난히 정신 못 차린 초짜가 프로 무대에 당당히 입장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일 수도 있다. 자신감이 위축되려 할 땐 가장 자신 있는 액수로, 가장 자신 있는 기법으로, 배트를 짧게 쥐고 한푼 두푼 다시 모아가기 시작해야 한다. 돈이 모이는 것도 기운이라 물꼬를 트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이 패배할 수 있다. 조지 소로스도 일이 꼬일 땐 움츠린다. 세계 최고의 트레이더들은 실패의 악순환을 반드시 끊어내고, 적은 금액부터 다시 차분히 꽃 키우듯 가꿔간다. 심지어 프로 갬블러들도 승기를 잡을 때까진 적은 금액으로 놀게 마련이다.

논외의 얘기지만, 투자의 세계에서 가장 흉운은 첫 타석에서 홈런 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죽어도 홈런의 꿈을 못 버린다. 몇 년이 지나도 손끝의 그 짜릿함이 잊히질 않는 것일 터. 다른 모든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번트를 노리는 사람은 남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홈런을 노리다가 날린 돈이 너무 많아져 돌아갈 곳이 없다고 얘기한다. 자신은 홈런을 치기 위해 태어난 그런 유전자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안타깝다. 일전에도 한 번 얘기했지만, 도박 중독자들이 늘어놓는 레퍼토리와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자금관리는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석에서 때에 따라선 번트를 치는 자세이다. 출루하지 못할 시에 잃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이해하는 전략적 선택이다. 지고 있을 때, 혹은 이기고 있으나 반드시 이겨서 끝내고 싶을 때, 자금관리를 시작하면 절대 대패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론 대승은 하지만 대패는 하지 않는 장군이 최강의 장군이다.

트레이딩 룸을 회고해본다 8 (번트)”의 1개의 생각

  1. 길지않은 개인투자경험으로 얻은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시장에 수긍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시장은 끊임없이 변하고 어떻게 될지를 확신할 수 없이 급변하는 시장에

    수긍하지 않는다면 나의 관성에 의해 결과가 정해지게 되기때문에

    결국은 제풀에 지쳐 넘어지게 되죠.

    실제로 자신의 머리 혹은 감각을 믿고 투자를 한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손실로 귀결되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정하고 배울 수 있는 그릇과 인내심,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확신과 유연한 사고,

    치우침 없는 신념이 있어야 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수많은 포트폴리오 중에서

    최고의 투자 대상 즉, 팻 피치를 선별해서 홈런을 날릴지

    스윙만을 남발하며 손실을 키울지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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