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장의 즐거움
나는 가끔 늑장 부리는 것이 즐겁다. 세시간만에 끝낼 일을 12시간 동안 늑장을 부려보는 것 말이다. 이런 류의 늑장을 어떨땐 아주 의도적으로 즐기는 것 같다. 어쩌면 몇 남지 않은 취미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종류의 늑장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대부분 일 하는 사람들은 늑장을 혐오하지 않는가. 나도 시간 약속에 대해선 엄한 편이고, 의미 없는 늑장은 질색이다. 실로 인생에 허용되는 늑장은 종류가 딱 정해져있는 것 같다. 그것만 알면 적당히 늑장의 즐거움을 음미해볼 수도 있는 것 같다.
여러분들도 늑장을 즐겨본 일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시험 전날 딴 책 읽기 같은 것 말이다. 어째 불안하면서도 집중력이 장난 아니다. 살아있는 느낌이다. 뭔가 할 일이 있는데 쉬고 있는 기분. 여유를 즐기는 기막힌 방법이다. 물론 때론 아무런 할 일이 없어진 휴식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휴식은 금방 질린다. 어쩌면 머릿속에 일을 쌓아놓고 사는 것이 즐거운 것일 수도 있고, 그럼에도 짬을 내 여유를 부리는 것이 즐거움일 수도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늑장을 부리는 학생들이 늑장을 부리지 않는 학생보다 효율은 물론 최종 결과물의 질도 훨씬 좋다고 한다. 단, 늑장을 부리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니 늑장을 부리다가 결국 일을 해치우기만 하면 결과가 더 좋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어쩌면 똑똑한 사람들이 더 늑장을 좋아해서 생긴 통계적 현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내 생각엔 늑장엔 두 종류가 있고, 일에도 두 종류가 있다.
매우 창의적인 일이 있고, 창의성이 별로 필요 없는 일이 있다. 창의성이 별로 필요 없는 일은 사실 늑장이 무용하다. 특히나 남과 협업하는 일이라면 늑장을 부릴 수록 조직 전체의 업무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는가. 여행 떠나는 날 아침 짐 싸는 걸 늑장 부리거나 하는 일은 정말 무의미하고 본인에게도 즐겁지 않은 늑장이다. 반면 창의성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직관을 모두 활용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두뇌의 이완과 긴장을 모두 활용하여 최종 정리된 결과물을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일찍 의사결정을 하는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떨 땐 생각을 더 묵혀놨다가 마지막 순간에 확 몰아치는것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게으름이 몰아닥쳐서 생기는 불안하고 패배적인 늑장은 즐겨선 안된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살짝 미뤄놓고 재검토하는, 브레인스토밍 늑장이 즐거운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늑장을 부릴 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는 일을 할 필욘 없다. 파티를 하거나 집중도가 너무 높은 일을 하는 것은 좋은 늑장이 아닌 것 같다. 생각 구조를 여러 갈래로 헤집어 놓고 상상력이 나래를 펴게 하는 일이 좋은 것 같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창업을 하고 가장 마음이 편안한 나만의 시간은 엑셀을 할 때이다. 약간 설거지를 하는 느낌과 비슷하달까. 창의력을 별로 발휘하지 않고 노가다의 트랜스 상태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달리기 같은 운동을 통해, 어떤 이들은 음악을 통해 그런 것에 다다르기도 하는 것 같다. 엑셀은 그에 비하면 참 흉악한 방법이다. 그런데 머리가 복잡할 때는 데이터를 때려박고 이래저래 엑셀이 멈춰버릴 때까지 숫자를 가지고 놀다 보면 스트레스의 분출 같은게 된다. 어쩌면 일하는 척을 하며 다른 일에 늑장을 부릴 수 있는 명분이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나는 매일 늑장을 부리는 사람 같이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은 커리어 자체가 늑장이 별로 허용되지 않는 삶이었다. 트레이더를 할 땐 항상 분초의 다툼을 했고, 항상 그 시간 그 자리에서 필요한 의사결정을 준비가 됐건 안됐건 끝없이 강요 받았다. 창업을 하는 것은 트레이더보단 덜하지만, 더 파급이 크고 결과가 불투명한 의사결정에 쫓기듯 하루하루를 사는 과정 같다. 거기다가 늑장을 견제하는 자기 스스로의 정신적 채찍과 당근에도 쫓기듯 산다. 그럼에도 아주 작은 늑장의 여지들이 있는 일들이 있다. 하루쯤, 일주일쯤 판단을 늦춰도 되는 일들은 굳이 판단을 늦춰서 틈틈이 곱씹어 본다. 내 머릿속에서 그런 아이디어들이 느리게 발효되어 꽃을 피우는 과정 자체가 너무나 즐겁고 편안한 과정 같아 이런 여유의 구간을 항상 남겨놓고 싶다.
쫓기듯 살기만 해서는 창의적인 뇌가 멈춰버릴 것이다. 늑장의 합리화를 통해 가끔은 쉼표를 선물해줄 수 있기를.
관련하여 waitbutwhy 블로그의 작가가 ted 에 나와 얘기한 why procrastinators procrastinate (왜 늑장인들은 늑장을 부리나) 추천.
3시간에 할 수있는 일을 12시간 동안 하는 것도 묘한 쾌감을 주지만 12시간이 주어진 일을 3시간만에 하고 남들 일할 때 노는 것도 묘한 쾌감이 생기더군요. 아마 비슷한 느낌의 쾌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들은 12시간 걸리는 일을 나는 3시간만에 해버린다는 우월감 같은 걸까요? 그런 우월감이, 자신감이 성과를 높이는 창의력의 원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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