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대한 이야기

누구나 그렇겠지만, 생각해보면 젊은 날에 내가 배운 기술들이 참으로 고맙고 신박하다. 그것을 가르쳐주신 분들은, 그걸 배우고 익히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낸 것이며, 그 사부의 사부들의 지혜와 세월을 얼마나 물려 받은 것인가.

나는 열심히 배운 것 같다. 고백컨대 처음엔 잘도 못 배우고 열심히도 못 배웠다. 배우려 해도 의지가 생기지 않고, 다른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딴 생각 많이 하는’ 전형적인 못난 제자였다. 그리고 그런 류의 후배들이 나에게 고민을 토로하기도 한다. 자신은 배우고 싶은 목마름이 너무나 큰데, 윗사람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너무나 나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괴롭다, 는 것이 요다. 나도 딱 그랬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큰데 집중이 안됐다. 뭔가 아닌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뭔가 집중할 계기나 환경이나 배움이나 조건이 덜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자신의 부족이 아니라, 아직 때가 덜 됐다는 느낌. 느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 탓이지만, 뭔가 더 큰 덩어리가 기다린다는 느낌 말이다. 지나고 보면 자랑할 일도 아니다. 결국 내가 부족한 것이고, 그야말로 때가 덜 되고 철이 아니어서 생기는 마음이기도 했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초등학생이 미적분을 배울 때가 아닌 것과 비슷하다. 결국은 그릇이 덜 차서이지만, 역으론 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그릇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이다.

어쨌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자란 제자에게도 때는 다 오게 마련이어서, 언제가 되니 결국엔 누구보다 열심히 배웠다. 저렇게 열심히 배우려는 친구는 드물다는 얘기도 들었고, 슈퍼스타들한테도 자신이 본 사람 중에 가장 열심히 배운다는 얘기도 들었다. 배우려는 의욕이 내 자랑이었고, 내 부끄러움이었고 컴플렉스였고, 결국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배움에도 때가 있다. 때가 되지 않아 배우기 싫을 ‘때’도 있고, 때가 되어 절대로 밍기적 거리면 안되는 ‘때’도 있다. 공부에 다 때가 있다고 하지만 단순히 어린 것만이 때가 아니다. 첫 2할과, 그릇이 찰 때의 마지막 2할이 가장 흥이 난다. 나머지는 고난과 혼란과 인내의 연속이 아닌가 싶다. 그 인내는 요행히 잘 견뎌냈지만, 때가 왔을 때 집중해서 공부를 한 것이야 말로 정말 잘한 일 중에 하나다.

몇년을 묵혀보니 그 배움 중에 다수는 언젠가 누구나 다 배울 수 있는 것들이었고, 그 중 어떤 것들은 남들은 누구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 것이 아마 ‘기술’일 것이다. 우리 업계 우리 선배 그 중에 아주 소수만이 갖추고 있는, 노하우 말이다. 다행한 것은 그 기술이 누군가에게 값어치 있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전기 기술자가 천장에 전선을 설치하고 20만 원을 받을 때 느끼는 경이처럼, 누구나 밥벌이를 하는 모종의 기술을 전수 받을 기회가 있다. 그 기술의 원천과 진의는 그다지 심오하지 않아도 좋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일단 적극적으로 배워보길 권하곤 한다. 기술을 한가지를 장착하면, 그것의 용도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손발을 놀리듯, 내가 다룰 장비 하나를 익히면 그 다음의 길이 열리는 것 같다. 그 기술에서 자유로워질 권한마저 생기는 것 아닌가 한다.

나는 관상쟁이가 관상을 보듯, 풍수쟁이가 풍수를 보듯, 시장을 보는 기술을 물려받고 훈련 받았다. 미국에선 자신의 출신을 얘기할 때, trader by training – 트레이더로 훈련 된 사람, 같은 표현을 쓴다. 훈련 되어졌다는 수동적인 의미가 많은 겸허함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나는 미결제약정, 피봇, 이평, 호가, 내재변동성, 금리, 환율, 베이시스 같은, 남들은 평생 한번 볼까 말까한 지표들을 보며 그 안의 수맥 같은 의미를 눈으로 보듯 선명하게 읽는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그게 그 영역에서만 쓰이는 지표들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응용되어 쓰일 수 있다는 것이 교육의 참 목적이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외우면 평생 그것을 세상에서 재확인하는 재교육 과정을 겪게 되듯 말이다. 어떤 작은 기술을 통해서든 결국 큰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 사부들에게 평생 고마워하는 이유이다. 인형을 깎는 사람은 조각칼 속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니까.

내가 기술을 많이 배우고 싶었던 한 형은, “나는 세상에 배우는게 가장 자신 있어. 사수가 있다면 무조건 따라하고 열심히 배울텐데, 배울 사람을 찾기 힘드니 갑갑하다”라는 말을 하셨다. 감동 받았다. 그 때 내 마음이 그제서야 그랬기 때문이다. 그 형은 업계 최고라는 평을 받고 있었지만, 업계 최고이기에 업계에서의 평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의 자유가 있으셨던 것 같다. 정말로 더 겸허하게 배울 간절함이 느껴졌다. ‘나 따위가 업계 최고라는 것은 우리 업계가 그만큼 코딱지만하다는 의미 외엔 없다’고 말하시는 것 같았다. 겸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더 넓게 크게 보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니 쉽사리 최고가 됐을 수도 있다. 여의도 최고라는 것은 그 형에겐 그야말로 고등학교 두개 평정한 동네짱 정도의 느낌 밖에 안됐던 것 같다. 세상을 무대로 봤던 것이 아닐까.

그런 형들에게 경이를 느끼던 것이 내 배움의 자세였던 것 같다. 몇날 며칠을 곱씹었고, 그런 자세를 배우고자 했다. 워런 버핏을 경이하면 그의 발끝은 따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배움에 대한 이야기. 배움이 목마른데, 쉽게 다 떠먹여주는 사부들이 있던 시기가 그립다.

배움에 대한 이야기”의 2개의 생각

  1. 경상도에서는 스스로 목표한바에 이르지못하여 배움을 갈망하는 자세를 ‘애살’ 이라고도 하더라구요.
    결국 당위적인 목표보다, 배우려는 그 ‘애살’이 지금의 성장을 주도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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