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속농업은 무엇이고, 왜 주목 받는가

Permaculture 는 permanent (영속, 영구)와 culture (농업 agriculture + 문화 culture)의 합친 말이다. 즉 원래 번역은 영속 농업이 맞을 것 같다. 그러나 검색해봐도 쓰는 이가 거의 없고, 표현이 썩 유려하지도 않아 다른 표현을 고민해봤다. 지속 농업, 자연 농업? Food forest 혹은 food garden을 추구하고 있기에 식료 숲, 먹는 숲, 먹거리 숲, 음식 숲, 먹는 정원 등등의 직역도 시도해보고 자연 농원이나 비슷한 의역을 검토해봤지만 와닿진 않았다. 그런데 애초에 permaculture 는 노자가 주창한 무위자연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니 인위를 제거하고 자연의 힘을 빌린다는 의미에서 ‘무위 농업’이라 하면 어떨까. 혹은 자생농업이란 표현도 좋다. 드디어 농업을 자연의 손에 다시 맡김으로써 폭발적인 생산성의 향상과 노동 개입의 최소화, 그로 인한 효율의 극대화, 자연 재생하는 토양의 조화를 누적시켜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동시에 상당히 유유자적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그런 날이 오는 것일까. 어쨌든 이 글에선 감히 ‘무위농업’ 이란 표현을 쓰겠다.

permaculture

(permaculture 의 예)

 

무위농업의 가능성에 대해서 우선 순수한 농업 생산성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후 경제적 (투자 차원)으로 살펴보고, 조금 더 나아가 현대인의 삶에, 또 인류사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한번 간략하게 살펴보자. 셋 다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주제들이지만, 이 블로그를 찾는 분들은 특히 투자 차원의 주제가 재밌을 테니 끝까지 읽어보시길 기대한다.

근대 농업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노동력을 요구한다. 귀농이라 하면 맑은 공기와 정감 있는 풍경 속에 스트레스 없는 나날을 꿈꾸시겠지만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귀농 후 중도 포기하는 이유는 벌레(낯선 자연, 불편한 현실)와 외로움 등을 제하고도 극렬한 노동을 강요 당하기 때문인 것 같다. 땅이란게 일궈도 일궈도 일이 늘기만 하고, 생각만큼 생산성이 나오지 않는다. 힘들게 일한 재미로 성취감을 느끼려는 찰나에 작물들이 가뭄을 맞아 좌절하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정성 어린 수확을 끝내고도 팔 데가 없거나 심지어 공짜로 줄 사람이 없어서 썩혀 버리는 고통을 맛봐야 한다. 노동의 굴레가 굉장히 강하다는 점 대비 생산성이 낮아서 금방 로망을 시들게 만든다고들 한다. 우리가 꿈꾸던 대자연의 이치는 이러한 것이 아니라 유유자적과 무위자연의 삶이었을진대, 근대 농업의 길은 가혹하기만 하다.

왜 자꾸 ‘근대’라고 하는 것일까. 예전의 농업은 조금 달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토록 부자연스러운 농사를 짓고 있었을까? 이런 농사가 필연일까, 아니면 타협이었을까, 아니면 외도인 것일까. 1960년대에 발견된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 (https://en.wikipedia.org/wiki/G%C3%B6bekli_Tepe)라는 고대 유적지가 있다. 1만2천 년 전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고대 종교의식 터전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도 이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담겨 있다. 이 신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논쟁점은 우리가 아는 ‘조직화된 농업의 발명’ 이전 시기의 유적지라는 것이다. 농업으로 인한 잉여가치로 인해 종교가 생겨났다는 학계의 기존 주장이 전면 도전 받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종교가 생겨났기 때문에 종교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인위적인 농경이 생겨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면, 어쩌면 농업은 그다지 지혜와 필연을 토대로 점진적 개선을 이뤄온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되려 경제와 정치의 부산물일 수도. 그렇지 않아도 농업 시스템 내의 너무나 많은 모순들을 설명하기 힘들었는데 이런 관점은 참신하다.

70년대에 permaculture 라는 관념을 창시한 Bill Mollison (https://en.wikipedia.org/wiki/Permaculture) 교수는 어느날 너무나 울창한 밀림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연은 왜 그대로 둬도 이토록 울창하게 번성하는가, 이런 위력을 농업에도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자연은 그대로 두면 언제 어디에서나 폭발적인 생산성의 숲을 만들어낸다. 사람이 인위로 멈추기엔 너무나 촘촘한 그물로 불도저처럼 진군한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지역에서도 자연의 자가발전은 경이롭다. 그런데 왜 농업은 이토록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어쩌면 ‘근대’인지 ‘고대’인지 모르는 어느 시점에 사람이 자연의 길에서 이탈하여 허망한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두가지 면에서 생각해볼 만하다.

첫째, 우리가 자연의 길에서 이탈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우리의 사고는 대단히 환원적이어서 모든 사물, 요소, 기능을 서로 독립적인 무엇으로 인지하고 있다. 한 우물을 끝까지 파면 그 우물의 해법은 나오게 마련이라는 식이다. 이런 것이 ‘인위’ 아닐까. 실제로는 수백개 수천개의 얼레로 엮여 있는 생태계에 지나치게 파편적인 분석과 단순화를 시도하는 것이 근현대 과학의 편협적 문제였다.

이런 사고가 농업에도 지독하게 녹아 있다고 본다. 추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밭에 작물 하나만을 심으니 병충해에 취약해지고, 병충해를 잡으려고 지독한 화학약품을 뿌리니 몸에 안 좋고, 잡초가 영양분을 뺏는다고 뽑아버리니 땅이 말라버리고 가뭄에 시달리고, 땅을 엎어버리니 단기적으로 미생물의 활동이 증폭하지만 멀지 않아 에너지를 다 불태워버리고 활동을 멈춰버린다. 다시 땅을 엎고 거름을 줘야만 하는 죽어가는 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거름을 장만하기 위해 경작지의 수배가 넘는 목장이 필요하고… 이런 식이다. 눈 앞의 문제는 분명히 해결했다고 볼 수 있지만 문제들을 해결하면 할수록 뭔가 전체적인 그림은 산으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결국 우리는 해가 갈수록 더 공산화 되는 음식료를 접하며, 안전을 신뢰할 수 없고, 감성을 느끼지 못하며, 가격은 비싸지고, 무엇보다 (셰프들에 의하면) 맛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구가 파괴되고 있는 것도 누군가에겐 걱정일 것이다.)

둘째, 그러나 이런 방식은 농업 전체의 특성이 아니라 일부 grain agriculture, 즉 벼농사나 밀농사에 최적화된 방법이 너무 보편화된 것이 문제다. 우리가 원하는 무위농업에서도 곡식을 효율적으로 경작하긴 쉽지 않다. 곡식은 손이 너무 많이 가고 경작 과정이 복잡하다. 기계화 공장화 하는 것이 맞다. 곡식은 저장이 용이하여 거대 도시를 만들고 과학을 만들고 전문 예술인을 양성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저장이 용이하니 부가가치의 저장이 되었고, 저장소를 방어할 경찰력이 필요했고, 따라서 거대 문명을 일으키고 전문 사제를 만들고 전문 정치인을 만들고 권력을 만드는데도 크게 일조했다. 그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곡식은 경제 정치의 발전을 주도했고, 그러다 보니 곡식을 경작하기 위한 농경모델이 세상을 지배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어쩌면 인간이 단순한 것을 음미하고 추구하는 모든 이유는 곡식의 단순성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곡식이 아닌 모든 것은 복잡성을 띄지 않는가.

유발 하라리를 포함한 다수의 학자는 이러한 농경사회가 더 많은 가뭄과 기아를 일으키고, 신체 조건을 비약적으로 축소시켰으며, 인류의 평균수명을 단축시키고, 행복의 조건을 크게 악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뭐, 인류는 건강과 행복을 잃었지만 어쨌건 과학과 문명과 지구 지배력을 얻었으니 일단 넘어가보자.

농업에서 가장 큰 노동은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땅을 가는 것.

둘째 물을 주는 것.

셋째 잡초를 뽑는 것.

넷째 거름을 주는 것.

다섯째 병충해를 잡는 것.

물론 씨도 뿌려야 되고 수확도 해야 되지만 그건 차라리 행복한 일들이다.

농촌에서 조금이라도 생활해본 사람이라면 봄 되면 땅을 가는 사람, 물을 대기 위해 끝없이 고민하는 사람, 하루종일 허리가 휘도록 김을 매는 사람, 무거운 거름이나 화하비료를 짊어지고 뿌리는 사람, 농약을 치는 사람으로 끝없이 변모해야 하는 이웃들을 봐왔을 것이다. 땅을 갈지 않으면 농작물이 자라지를 않고, 물은 잠시만 안주면 땅이 말라 비틀어 버리고, 잡초는 며칠만 냅둬도 엄청나게 자라서 햇빛과 영양분을 뺏어가며, 거름이나 비료를 주지 않으면 작물이 비실대며, 병충해는 해마다 더 심해져 점점 독한 화학 농약으로 아주 땅을 조져놔야 하는 슬픔이 있다.

무위농업이란 이 과정의 모순을 지적한다. 자연에서는 이 다섯가지가 없어도 작물들이 황홀할 정도로 폭주한다. 땅을 갈지 않아도 매년 낙엽과 잔가지가 쌓여 토양 속에 미네랄과 질소가 넘쳐나고, 그런 토양 속에서 다시 미생물들이 생태계를 구축하며, 지렁이며 벌레가 헤집은 땅은 건강한 비료가 잔뜩 쌓이며, 몇달씩 비가 안와도 수분을 머금고 있으며, 틈틈이 공기 구멍으로 산소가 움직인다. 이런 환경에서는 나무들이 미생물과 각종 곰팡이 등 유기물을 통해 수십킬로 밖의 다른 나무들과도 소통하고 있음이 최근에 알려졌다. (https://www.ted.com/speakers/suzanne_simard) 또한 잡초는 열린 토지가 비에 노출될 때에 토양의 표면에서만 주로 자라기 때문에 농지에 그야말로 최적화된 생물이다. 반면 숲에서는 잡초가 과도한 경쟁에 밀려 잘 자라지 못해 문제가 아니다. 병충해 역시도 폭발적인 종의 다양성 때문에 보기 드물다. 숲 속 나무의 종이 다양하여 병에 강한 면이 있고, 특정 해충이 늘어나면 익충들의 포식으로 인해 개체수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과일을 좋아하는 새들이 모여들면 벌레들도 잡아먹고, 씨를 옮기면서 거름까지 준다. 곳곳에서 버섯이며 과일이며 약초가 자란다. 뭐 인간이 손댈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 대다수의 숲이 인간을 부양하진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무위농업이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그런 고대 숲을 만들어 자연을 복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숲이나 자연은 황금율에 의해 생성된다기 보다는 엄청난 유연성과 강인함 등 자연의 원리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원리들과 싸우지 말고 그 원리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하여 인간과 그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현대적이면서 동시에 순응적인 먹거리 숲을 만들자는게 무위 농업이다. 그 이치를 일일히 여기서 다 소개하진 않겠지만,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숲의 나무들을 ‘요소’로 보지 않고 서로간의 ‘관계’와 ‘역할’에 더 집중한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현대 디자인의 기본 철학과도 맞닿아 있지 않은가.

예컨대, 낙엽을 떨어뜨려 질소 거름을 제공하는 식물들과, 적당한 그림자를 만들어서 토양 표면이 말라버리지 않게 하는 나무들, 다년목 수풀과 채소 등을 골고루 섞어서 상호의존적인 하나의 3차원 군집을 형성시키는 방법을 써서 조화를 추구한다. 특히 땅 밑에 거대한 생태계를 장려하여 토양이 매년 더 비옥해지도록 여러 장치들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맨땅이 드러나지 않도록 두터운 자연산 피복 (주로 길거리 나무 잘라서 간 폐기물을 공짜로 구해다 쓴다)을 겹겹이 쌓아서 표면 밑이 촉촉하게 유지되도록 하거나 하는 식이다. 생산성을 높이면서, 동시에 최소한의 노동력을 사용하고,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자연에 정밀하고 효율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이다. 90%의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10%의 노력만 투여하고, 작은 실험을 통해 큰 가설을 확인하는 스타트업의 방법론과도 맞닿아 있다. 닭을 키우면 닭이 잡초씨를 파헤쳐 먹고 땅 표면을 긁어주며 벌레도 잡고 양질의 거름도 제공하게 되고, 잉어 연못을 만들면 잉어 배변이 섞인 연못물로 식물을 키울 수 있고 주변 온도도 낮춰주며 연못가에는 식물의 성장속도를 더 높일 수 있고… 뭐 만사 이런 식이다. 실로 진취적이고 현실적인 접근 방법이다.

Food forest 는 뒷뜰에 자생 가능한 거대한 신선채소와 과일 정원을 만들자는 취지이다. 에너지의 효율적 재사용 같은 장점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공장식 식료품 유통 체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 건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무엇보다 기가 막히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고,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 등이 강력한 영감을 준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논리와 그 결과 자체가 매우 매력적이다. 유기농 식료품 마저도 토양 자체에 화학약품을 쓴지 몇년이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백프로 믿을 수 있다고 보긴 힘들다. 무엇보다 음식의 유통 자체를 벗어나 광의의 제작 과정이 지속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도 많다. 화석연료를 얼마나 쓰는지, 비료를 얼마나 쓰는지, 거름을 만들기 위해 땅과 물과 환경오염은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하면 사실 생각하기 귀찮아서 그렇지 절대로 지속 가능한 방법이 아니다. 실제 농작물로 먹게 되는 수분의 2백 배, 실제 농작하는 땅의 4배 이상이 지속적으로 투입되어야 한다는 연구들이 있다.

그렇다. 무위 농업의 경제성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삶의 방식으로도 매우 조화롭고 느리고 안일하고 행복할 것 같다. 그야말로 에덴의 동산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에덴에서 나온 아담은 대규모 농업 사회로 들어선 인류를 상징한 것인지도 모른다.

경제성을 떠나 투자성을 생각해보자. 나는 투자자로서 솔직히 소름이 돋았다.

우선 한국에서 개봉한 빅숏 (big short) 에서 크리스천 베일이 열연한 Dr. Michael Burry (http://lynncinnamon.com/2016/01/the-big-short-how-michael-burry-invests-in-water/) 의 천재성을 기억하시는지. 이 분은 서브프라임으로 큰 수익을 낸 이후 집합투자가 지겨워서 모든 투자금을 반납하고 개인투자 모드로 들어갔다. 이때 한 얘기가 ‘미래엔 비옥한 농경지가 최고의 투자처’라는 예언(?)이다. ‘농경지’라는 단어가 투자계에서 비중 있게 언급된 것은 실로 수십년 만일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그의 투자가 물부족과 물 수요의 급증에 대한 베팅도 엮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실제 영화에서는 ‘물’에 대한 투자에 관심이 많다고 엔딩이 뜬다. 내 기억에 책에서는 농경지만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물은 따로 옮기기가 힘드니 물과 땅이 만나는 농경지에서의 생산품으로 수요가 반영될 수도 있다. 무엇이 됐건 그 핵심에는 ‘비옥한 농경지’가 있다.

세계적인 분석가이자 투자자 짐 로저스는 이미 십수년째 상품 및 농산품 투자를 강력 추천하고 있다. 짐 로저스는 (마이클 베리도 마찬가지지만) 단기적으로는 시장을 잘 못 보지만 장기적으론 반드시 경제의 흐름을 맞춘다. 리서치의 넓이와 깊이에서 남들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로저스는 식료품의 비축분이 역사상 최저 비율인데, 동시에 음식료 값이 상대적으로 역대 최저로 저렴하다는 모순점을 지적한다. 아마도 거대 트렌드에 의해 경제적 왜곡이 발생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보통 이런 왜곡으로 인한 투자 기회는 인생에 한두번 밖에 안 온다. 농경지로 우리의 관심을 옮기자면, 도매 음식료 값이 싸서 정부 보조를 받을 정도로 수익성이 낮기 때문에 농경지 가격은 더더욱이 경제 규모 대비 역대 최저로 저렴하다. 대한민국에 농경지 투자를 제대로 된 투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대단히 소외된 시장이며, 그래서 말도 못하게 (다른 모든 것 대비 역사적,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것이다.

농경지는 여러 이슈가 절묘하게 포개져 있다. 전세계적인 수급 불균형과 소외만으로도 투자처로는 손색이 없지만, 날이 갈수록 실질적인 가격 상승을 견인할 계기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최근 들어 점점 높아지는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다. 유기농 식품들의 가격이 치솟는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니다. 여러 사회 현상과 물려 있지만, 현상 자체는 진짜다. 진짜 큰 트렌드이다.

둘째는 탈도심화이다. 인터넷의 발전으로 재택근무나 위성근무 등이 발달한다면 결국 인류는 탈도심화의 거대한 물결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 추세의 전환이 있다면 여태 짓눌려온 전원 토지 가격은 큰 변곡점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3~40대에게 도심에서 애들 키우며 살고 싶은지, 전원으로 가고 싶은지 주위에 물어보면 답은 명확하다. 이들이 아직 움직이지 않았을 때가 실제로 가장 가격이 눌려있는 구간이다. 해가 뜨기 직전에 가장 어둡다고나 할까.

셋째는 식량은 국가적인 안보 이슈라는 것이다. 특히 주식인 쌀과, 신선야채류는 국경을 마음대로 넘기가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힘들다. 안전한 먹거리 이슈가 겹치면 더욱 그렇다.

결국 건강한 음식료 가격이 하락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유일한 희망 혹은 리스크라면, 수경재배와 수직재배의 붐으로 시장의 구조가 뒤바뀌거나 아니면 한국 농산물 유통 시장의 부정부패가 확 뿌리뽑히고 현대화되는 것이다. 둘다 현실화 된다고 하더라도 양질의 농경지 값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 필요성은 높아지고 수급은 계속 조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환경 변화다. 가뭄이나 온난화, 식수 부족으로 농업에 충격이 온다면 양질의 농경지는 역으로 가격이 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여러 경제적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농경지 투자에 걸리는 점, 리스크, 비용은 거시적으로 무엇일까.

첫째는 땅을 사놓고 있어도 배당이 너무 적다. 임대를 줄 수 없다면 땅이 생산하는 배당이 거의 없는 셈인데, 현재 임대료율이 높지 않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많지 않아 임대 수요가 다소 부족하다. 이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남는게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는 땅을 사놓고 가꾸지 않으면 땅이 퇴화한다는 것이다. 관리되지 않은 땅은 비옥도가 오히려 떨어져간다. 잡초만 무성한 땅이 되면 생산성은 더 떨어진다.

땅 자체의 가격이 오를 가능성은 높지만, 그 땅이 가져오는 배당수익은 당장 긍정적으로 보기 힘들다는 점이 첫번째. 부동산으로 비교하면 지역이 발전해 빌딩은 가격이 오를 것 같지만 임대료 수익율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이를 투자에서는 cash flow 라고도 하고 carry 라고도 한다. 캐리 트레이드의 그 캐리다. 투자를 유지 보유하는데 비용이 발생하느냐, 아니면 조금이라도 소득을 얻느냐 하는 문제다. 토지의 경우에는 수익 차원에서  carry 가 적다. 두번째 문제는 빌딩 자체가 관리를 안하면 가치 자체가 감가상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위농업을 봤을 때 속 시원히 풀린 문제는 위 두가지다. 대단한 노동력의 투입 없이 생산성이 있는 땅을 유지할 수 있다면 유기농 생산품으로 일정 부분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시간이 흐를수록 토양의 질이 저절로 개선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옥하지 않던 토지가 2미터 3미터 밑으로 유기물들이 가득 퍼져 사과 씨 하나를 던져도 사과 나무가 자라는 토양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거시 투자 관점에서 봤을 땐 매우 결정적인 이슈들이 풀린 셈이다.

투자 관점에서 봤을 때 언젠가는 양질의 농경지를 대규모로 투자해볼 생각이었는데 어쩌면 지금부터 무위농업을 통해 일정 부분 실험을 해보기 시작할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거대 트렌드를 포착했을 때 틀리는 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거대 트렌드는 타이밍을 잡기가 어렵고 길게는 5년 이상의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다. 장점이라면 상당히 부정확한 투자 실행을 해도 10~100배 규모의 수익에 올라타기는 쉽다는 것이다. 필자의 예언(?)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런 거시 분석 트렌드 길목잡기 투자가 가진 특징이다. 다만, 너무 일찍 트렌드를 포착하기 십상이고 추가적인 리서치를 많이 요한다는 점, 규모의 경제 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과 구체화 등의 과제가 많이 남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Global macro investment 의 궁극에서는 execution 즉 구체적인 상품의 활용과 진입 설계가 아주 중요한 이슈이다.

원하는 분들이 있다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자금을 모아 수년에 걸친 실험을 해볼만하다. 크라우드 펀딩으로도 해볼만.

자, 투자 얘기는 다 했으니 인생 얘기를 해보고 싶다.

현대인의 삶에 무위농업이 제시하는 해법은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사실 상당히 역사가 깊고 심오한 동서양의 담론이 있다. 생태주의와 자급주의 (subsistence) 철학은 인간이 작은 공동체에서 일정 수준 자급자족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급자족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식품의 안정성과 인간성의 복구이다. 도심에 살면서 누가 만든지 모른 음식을 먹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 채 보내는 하루하루가 갑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주어진 공간에 인구밀도가 늘기만 해도 인간성은 다소 퇴화된다고 생각한다. 하루에 한명의 사람을 만나는 것과, 하루에 만 명의 사람이 스쳐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인간에 대한 소중함이 더 클까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생태주의는 좀 히피스러워 부담스럽긴 하나, 서로 얼굴을 알만한 사람간에 얼굴을 마주보며 인간미를 느끼고 소중함을 느끼며 서로 돕고 사는 ‘소규모 공동체’를 강조한다. 과도하게 비인간적인 공산 과정을 겪은 공산품의 유입은 그 공동체에 이롭지 않기 때문에 되도록 자급자족하겠다는 것이다. 이 모델이 비록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되긴 하였지만, 이런 인간적인 공동체들의 유기적인 성장을 통해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은 칼 마르크스는 물론 경제학의 아버지인 아담 스미스도 중시 여기던 모델이다. 모든 사람이 공동체를 뛰쳐나와 도시로 이주해 기업이나 산업의 부품으로서 파편화된 직무를 수행할 때 사회는 그 강력한 응집력과 질서, 재생력과 인간성을 잃기 시작한다. 오직 하나의 복제 가능한 부속품이 되어 취업과 퇴직 사이에 내 존재의 모든 것이 놓이는 운명을 우리는 억지로 들이삼키고 있지 않은가. 몇 천 년 전 동양에는 노자가 무위자연의 길을 벗어나지 말기를 당부한 것도 이런 뜻이 아닐까.

그러나 원시적인 자급자족은 우리의 최선책이 아니다. 적당하게 효율성을 높인 인간성의 회복이 더 매력적이다. 즉 티비와 노트북과 싱크대와 자이글은 사서 쓰고, 필요한 모든 정보와 생산 활동은 인터넷을 통해 해도 된다. 전기는 원자력 발전소 전기를 쓰고 태양광으로 보조를 해도 좋다. 쿠팡으로 필수품을 주문하고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 어떠랴. 오히려 그런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뒷뜰에 농장을 경영하는게 더 매력적이 된 것이 아닐까? 자연과 미래의 얼레를 엮어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아닌가 한다.

우리는 태생이 그래서인지 흙과 그 부산물을 사랑한다.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며 경이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직접 키우면 더 신비롭기만 하다. 직접 만든 음식이 주는 행복과 맛을 경험할 땐, 내가 왜 뭐하자고 도시에 살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곤 한다.

특히 나는 진화적 관점에서 우리를 둘러보고 싶다. 우리는 길거리에 텐트 치고 들어가 앉기만 해도 묘한 설레임에 빠진다. 인류가 더 넓은 자연으로 진군할 때의 본능이 남아서일까. 또한 단조로운 디자인을 보다가 복잡한 그림을 보거나 어지러운 잡동사니 상점에 들어가면 눈과 뇌가 활발히 패턴을 찾으며 묘하게 편안한 뇌파에 취한다. 우리는 복잡한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패턴을 찾는 것을 좋아한다. 어쩌면 문제를 푸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일렬로 정렬한 전봇대나 공산품을 보고 마음의 평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한편으론 어지러운 복잡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자연으로 돌아오라는 일종의 부름이 아닐까. 나는 개인적으로 일렬로 맞춰선 아파트도, 묘목도, 쇼미더머니에 차렷 자세로 정렬한 래퍼들도 보기 불편하다. 단조로움의 극치인 일본식 정원보다 대자연의 복잡함을 표현한 중국식 정원이 상상력을 더 자극한다. 획일화된 것들에는 즐거움이 적다. 오직 관심의 결여로 인한 머리의 가벼움이 있을 뿐이다. 잘 조절된 품질의 안정성이 있을 뿐이다. 탐색이 없고 놀라움이 없다.

인류는 이제 자연과 싸우고 지배하고 짓밟고 압박하기 보다는, 자연의 위대한 재생능력과 힘을 최대한 조련하는 법을 배워야할 때이다. 유전자를 조작하는 법을 우리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익혀왔다. 굳이 화학적으로 조작하는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연을 길들여서 그 강력한 힘을 우리를 위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지런한 숲에 스스로 방문한 새들이 우리를 위해 벌레들을 열심히 잡아먹어준다면 우리는 새들을 쫓을게 아니라 오히려 환영해볼만하다. 공존의 시너지인 셈이다. 지렁이, 닭, 강아지, 나무, 잡초, 그리고 마침내 우리까지도 조금더 우리에게 맞는 옷을 입는다면 더 즐겁지 않을까.

사람에게 다소 더 맞는 옷이란 최소한 나에겐 맑은 공기를 마시며 주위의 것들을 관찰하고 조율하며, 그 수확물을 주변인과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밤에는 블로그를 쓰고 그 과실을 택배로 멀리 보내주는 것도 동시에 가능한 일이다. 교육 때문에 도시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유투브와 구글에 있는 교육 자료가 과학고 선생님의 지식보다 월등히 더 풍부하다. 부족한 햇살과 비타민을 우리의 뜰에서 채취할 수 있다면 삶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더불어 도심에서의 소모품 같은 일개 요소로서의 직업이 아니라, 조금 더 자신의 개성과 삶의 가치들이 녹아 있는 프리랜서로 살아갈 수 있는 산업에서 내 자리를 찾을 수 있다면.

나는 수천의 유기물이 섞여 수백 종의 나무가 자랄 수 있다는 비옥한 토양을 만지고 냄새 맡고 싶다. 그것이 매년 우겨 넣어야 하는 비료와 거름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우리보다 거대한 자연 이치의 한 타래를 풀어놓은 것이라면. 그 힘을 빌려 나의 풍요로운 정원을 만들 수 있다면, 정원은 나의 육신을 죄어오는 노동의 굴레가 아니라 나의 벗이오 이웃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글을 쓰며 장르가 여러번 바뀐 느낌이다. 사실 나는 전문가도 아니니 잘못 설명한 것들도 다수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결국 핵심은 permaculture 에 대한 관심을 가져보시라는 이야기였다. 몇개의 유투브를 추천드리니 함께 보시기를. 또한 관련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댓글로 달아주시길 부탁드린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w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