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오 개발기를 통해 본 로보어드바이저의 간략한 역사

로보어드바이저?

돈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딨을까. 로보어드바이저란 이 고통을 조금 더 완화시키기 위해 나온 산업이다. 한 조사에 의하면 30대 중 80% 이상이 돈과 관련한 문제에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한다. 연금저축은 들어야 하는지, 전세자금은 어떻게 구하는지, 투자한 펀드를 팔아야 하는지, 카드빚은 어찌해야 하는지, 돈 떼먹은 친구 어떻게 잡을지, 심지어 옷을 사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두 돈에 관련된 문제다. 최근에 ‘영수증’ 같은 재무 상담 티비 프로가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항상 일정한 답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사정 사정 마다 미묘하게 적절한 대응법이 달라 일괄적인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경험 많고 노련한 자문역이라면 상대방의 성격이나 상황에 따라 비슷한 케이스들을 고려하여 답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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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김생민 님의 ‘영수증’ – 불리오 같은 서비스를 10년 넘게 기다려오셨다며 만나러 오셨었다. 진짜 멋짐)

침팬지가 투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효율적 시장 가설’

너무 복잡한 돈 문제들은 자문역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답이 다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장기투자에 대한 방법론은 답이 나왔다는게 학계의 가설이다. 단순 분산 투자를 해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수십년을 버틴다는 것이 요점인 소위 ‘효율적 시장 가설’이다. 시장이 너무나 효율적이어서 그 무엇도 사전에 알고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이론은 여러 노벨 경제학자를 낳았다. (반론을 제기한 학자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기도 하였다)

나는 이 이론이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난 수십년간 자문인/영업인에겐 일종의 복음처럼 전파 되었다. 공식적으로 투자 성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나름 논리적이고 일리가 있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효율적 시장 가설은 지난 60여년간 점차 퍼져서 90년대부터는 주가 지수 인덱스 (코스피 등)에 단순 투자하자는 유행으로 번졌고, 최근에는 연기금 등도 전부 인덱스 단순 투자로 기조를 바꾸고 있다. 일종의 묻지마 인덱스 투자가 유행하고 있어 이것이 지속 가능하느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쨌든 이 이론의 요지는 아주 간단한 포트폴리오를 들고 장기 투자하자는 것이다. 한국에선 예컨대 국내주식 50%, 채권 50% 를 들고 10년씩 보유하자는 이야기다. 중간에 손실이 날 수도 있고 심지어 결과적으로도 수익이 안 날 수 있겠지만, 사람들이 투자에서 불필요하게 고군분투하는 것보다는 어쨌든 조금이라도 낫지 않겠느냐는 소극적인 발상이 근저에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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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 워크 – 시장은 효율적이어서 모든 것이 랜덤하기 때문에 침팬지가 찍은 주식을 사는게 인간이 투자하는 것과 다를바 없거나 더 낫다는 자극적인 이론. 이 이론의 명저 ‘A random walk down Wall Street) 의 저자인 Malkiel 할아버지는 Wealthfront 에 고문으로 합류한다)

사실 통계로 본 근거들은 그럴싸하다. 일반적으로 100명이 주식 투자를 하면 95명 이상이 손실을 보게 된다. 이는 증권사 계좌를 조사해보던, 유명 주식투자 앱에서 참여자들의 순위를 살펴보던, 주위에 물어보던, 상당히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슬픈) 비율이다. 유명한 Dalbar 연구 자료에는 대중들은 주가지수의 4% 이상을 꾸준히 손해보며 투자한다고 한다. 평균치가 이러니, 어떤 사람들은 훨씬 손실이 클 것이다.

전문가도 이러한 손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타인의 수익에 실제로 도움이 될만한 제대로 된 전문가가 양성되는데에는 몇년의 고된 훈련 과정과, 탁월한 사고구조와 투자환경 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전문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혹은 그런 전문성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일관된 이론이 없다. 혹자는 좋은 투자란 배울 순 있어도 가르칠 순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특별한 의지와 계기가 있어야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트레이딩 룸에도 100명이 입사하면 95명이 실패하고 나가기는 일반인과 매한가지였다.

이렇게 일반인도 전문가도 시장 앞에선 대개 일관적인 패배자들인 만큼 효율적 시장 가설의 패배주의가 납득도 된다. 상위 1%의 투자자들의 기법을 분석하는 것보다 하위 95%를 보며 시장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훨씬 손 쉬운 일이기도 하다.

로보어드바이저의 등장

로보어드바이저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했다. 어차피 단순한 분산투자를 할 것이라면 굳이 은행이나 재무 설계사들을 만나 비싼 자문료를 내지 말고 그냥 인터넷으로 포트폴리오를 받아서 체결하고 자동으로 유지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미국에서 몇몇 팀이 이러한 서비스를 만들어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한국에선 낯설겠지만 이들이 Wealthfront, Betterment 등의 1세대 로보어드바이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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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어드바이저 Wealthfront 는 모바일 앱의 태동기와도 겹쳐, ‘내 손 안에 PB’ 개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로보어드바이저들의 초기 주요 타겟은 젊고 돈 잘 버는 실리콘 밸리의 신세대 IT 개발자 등이었다. 힙한 젊은층이 반감을 가지고 있던 금융권의 고리타분하고 불투명한 이미지 대신에 편리하고 새롭고 투명한 로보어드바이저는 제법 큰 관심으로 이어졌고, 불과 몇년 사이 1조원 단위의 자금을 모으며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Wealthfront 는 2010년에 만들어진 회사니, 실제 로보어드바이저의 역사는 그때로부터 약 7년 정도 되었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는 본격 대중 핀테크 서비스의 개화기와 겹친다. 2006년에 만들어진 온라인 은행/카드 계좌통합 관리 서비스인 ‘민트’의 성공을 보며 일반인들의 금융 서비스 사용 행태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한 세대의 기업가들이 본격적으로 핀테크 서비스를 파고 들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핀테크 서비스의 요는 강력한 사용자 편의성으로 기존의 불편한 금융 사용 경험을 혁신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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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웰스프론트에 들어가서 설문에 답하면 이렇게 특정 분산투자 포트폴리오를 제시해주는 것이 이 서비스의 핵심이었다)

미국 로보어드바이저의 특징

Wealthfront 는 tax harvesting 이라는 기술을 써서 세금을 줄여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해년도에 수익실현을 한 투자에 대해 세금을 물리는 미국 세제에 맞춰 고객 세금을 최적화 하는 기술이다. 간단히 말해 당해에 세금을 많이 내게 생겼을 땐 손실이 난 종목을 의도적으로 손실 확정시킨 후 거의 비슷한 종목으로 갈아타 평가손익들을 상쇄시키는 방법이다. 이 방법도 반드시 수익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얻어내는데는 성공한다.

한가지 더 주목할 부분은, 미국 사람들의 퇴직연금 계좌가 활용도이다. 한국인들은 전세자금 압박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저축을 잘 하는 편인데, 미국인은 생활비는 전부 써버리고 오직 퇴직연금 계좌만 믿고 사는 경우가 많다. 퇴직연금 계좌는 근본적으로 장기투자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를 어떻게 운용하는지에 따라 말년의 삶이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 1세대 로보어드바이저들은 낮은 수수료로 인한 장기 복리효과와 그럴싸한 포트폴리오, 세금 최소화로 퇴직연금 계좌를 중점적으로 공략한 것이었다.

워낙 재무 설계나 투자자문의 세계가 환상으로 가득찬 산업이라 언론에서 이들 로보어드바이저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는데, 이에 따라 사람들의 기대치도 매우 높아졌다. 일종의 로보어드바이저 hype 가 일어났다. 로봇이 자산을 관리해준다는 상상 자체가 흥미롭다. 그러나 실제 기술이 딱히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기술적으로나 금융적으로나.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가 수조 원을 모으긴 했지만 그 자체로 성공적이었는지는 반론이 있었다. 첫째로, 수수료가 저렴하긴 하지만 운용 자체가 특별할게 없다는 점이다. 둘째는 수수료가 너무 저렴하여 실제로 기업이 수익이 나겠냐는 기업 투자자의 관점이다. 1조를 모아도 0.3% 수준의 수수료를 받으면 30억 원의 매출이 나는 셈인데, 우수한 IT 인력과 인프라를 유지하는데만도 최소한 10조 원 이상의 운용자금을 모아야 했다. 사업성이 너무 약하다는 의견이 많았고, 실제로 로보어드바이저들의 밸류에이션이 폭증하지 않은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셋째는 전체 자금 규모 자체가 일반 RIA (공인 투자자문인)들의 전체 규모에 비하면 수백분의 일 수준이라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의견이다. 실제 로보어드바이저의 파괴력이 기대된다면 더 큰 자금이 모였어야 됐을 것이란 이야기다.

긍정적으로 본 각종 리포트들도 쏟아져 나왔는데, 미국 전체 투자자문 시장의 3.3%, 400조 원 시장 이상이 디지털 혁신을 거치지 않겠느냐는 관점으로 보면 미래가 촉망 받는 산업인 것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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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만 삭스 글로벌 인베스트먼 리서치에서 제시한 핀테크 혁신의 기회 중 로보어드바이저 시장의 400조 원 수준의 규모가 눈에 띈다)

한국 로보어드바이저

2015년 즘 한국에도 로보어드바이저를 본격 론칭하는 회사들이 나타났다. 두물머리의 경우 2015년 3월부터 로보어드바이저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초창기이긴 하지만 그 전에도 쿼터백이나 한두군데의 회사에서 ‘로보어드바이저’라는 생소한 키워드를 소개하고 있었다.

우리도 초기의 로보어드바이저로서 고민이 많았다. 트레이더 출신으로서 효율적 시장 가설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순 없었다. 트레이딩 룸은 매월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이 조직이다. 시장 때문에 못 벌었다느니, 아무리 매매해도 돈이 안 벌린다느니 변명을 늘어놓을 참이면 트레이딩 룸에서 나가는게 맞다. 일반인에게도 그런 방식을 쉽게 권하기 힘들었다. 모든 투자는 통계적 진입과 시장 환경 변화에 따른 적절한 대응이 근간이라고 생각한다. 통계적 이점도 대응도 없는 단순 분산투자를 고객에게 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다. 시장 좋으면 돈 벌고 시장 나쁘면 돈 잃는 투자라니 찝찝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젯시하는 투자 방법론이 복잡해질 수록 고객은 더 이해하기 힘들 것이란 제약 조건을 생각해야 했다.

당시에 딥러닝에 깊게 빠져 있었고 유전알고리즘이라는 것을 통해 시장내에 반복되는 패턴들을 대규모로 추출해내고 있었지만, 이 역시 일반인에게 쉽게 권할 것은 아니었다. 뽑혀나온 종목들이 소형주이거나 너무 빠른 매매를 반복해야 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최대다수의 고객을 설득하여 안정적인 수익률과 투자 성공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고수익을 주장하여 호객을 하는 것은 의미 없었다. 돈을 벌려면 트레이딩 룸에서 하는 것이 낫지 굳이 로보어드바이저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2015년 7월 경 일단 알파 테스트를 통해 고객을 만나보자는 생각으로 ETF (장내에서 거래되는 펀드) 를 중심으로 Wealthfront 같은 포트폴리오를 제안하는 모델을 만들어 리포트로 찍어 잠재 고객에게 보내봤다. 간단한 설문에 대해 나름 맞춤형 리포트를 준 것이다. 당시의 사업적 가설은 일반인들은 분산투자 포트폴리오조차 얻을데가 없기 때문에 이런 리포트를 주면 좋아할 것이란 생각이었다. 펀드의 불편함을 대체할 ETF 를 담되 투자의 목적과 기간에 맞춰 리스크를 ETF 비중으로 조정하여 투자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것이 단순 분산투자 포트폴리오로서는 사실상 최선의 모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바닥에서 흔히 얘기하는 블랙 리터만 모델을 사용했다. ETF 도 유동성에 맞춰 최대한 매매 가능한 ETF 들을 골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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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발견 – 두물머리 알파 테스트 버전의 ETF 포트폴리오)

이용자들에게 리포트를 보내놓고 직접 찾아다니며 피드백을 구해봤다. 그들의 반응을 접하고는 금새 ‘아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투명성을 강조하고 교육적 자료를 싣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지만 감동이 없는 서비스였다. 기억에 남는 피드백들은, “이렇게 투명한 포트폴리오는 오히려 매력이 없다, 트레이더인 형이 차라리 불투명하게 막 운용해주는게 더 고마울 것 같다”, “포트폴리오는 모르겠고 이런 ETF 가 있는지 처음 알아서 중국 ETF만 매수해봤다” 등이었다.

감동이 없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내가 봐도 단순 분산투자 포트폴리오는 별다른 가치가 없어 보였는데, 고객들도 인생의 경험을 통해 이보다 나은 방법론이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굳이 이런 포트폴리오 이론을 억지로 납득시키려고 한다면 위의 Malkiel 같은 효율적 시장 가설 교주들을 고용해서 고객들을 주구장창 교육시켜야할 일이었다. 그러나 어쨌건 서비스인 이상 감동이 없다면 끝이다. ‘더 나은’ 솔루션이 필요했다.

더 나은 운용 방법론이 있을텐데

더 나은 솔루션에 대한 설계는 트레이더 시절부터 해왔었다. 결국은 앞서 말한 통계적 진입과 대응을 구조화하는 것만이 답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만들어 고객에게 준다면 매우 산만하거나 복잡하여 설득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ETF 라는 것은 증권사 HTS 나 MTS 를 통해 직접 체결하는 것이어서 체결하고 손익이 1~2%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투기적인 충동이 온 몸으로 끓어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물건이 아닌가. 자산관리에 쓸 수 있는 것인지, 대안이 있는지 고민했다. ETF에 조금 더 복잡한 전략을 포함할 수 있는 ETN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ETF 가 전반적으로 유동성이 너무 부족하고 원하는 상품들이 상장되어 있지 않아 모두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미국의 풍부한 ETF 시장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이 당시 심도 있게 고민했던 것은 TDF (target date fund) 의 형태에 지능을 더한 버전이었다. TDF 타겟 데이트 펀드란 30년간의 장기투자에서 첫 20년은 공격적으로 가져가고 나머지 10년은 은퇴를 준비하며 점차 공격성을 낮춘다거나 하는 식의 상품이다. 공격성의 근거는 주식을 얼마나 담고 있느냐 밖에 없었으니 사실 아주 멍청한(?) 포트폴리오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럼에도 일리가 있는 부분이 없진 않아서 미국에서 수백조 원이 팔리는 대박을 쳤다.

금융권은 상품에 대한 장인 정신 (craftsmanship)은 거의 온데간데 없고 세일즈맨쉽 (salesmanship)만이 넘친다는 안타까움과 회한이 있다. 어쩌면 효율적 시장 가설이 금융인들의 뿌리 깊은 무의식에 자리 잡아, 어차피 고객에게 도움이 될 상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어 버린 것이 아닐까? 그러니 잘 만들 생각은 안하고 오로지 영업으로 팔 수 있는 물건만 만들게 되는 것 같다. 특히 투자업계는 대부분의 상품이 오로지 고객에게 판매 수수료를 받아 먹고 사는 구조다. 그러니 판매를 잘 하는 기술만 과도하게 발전하여, 오히려 고객들이 떠나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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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TDF 시장 규모는 천조 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쨌든 TDF 의 인기에는 장기투자를 단 하나의 펀드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한 펀드만 팔아도 되는 간편함도 있을 것이다). 아래의 그림은 우리가 만들어낸 일반적인 TDF 구상도의 하나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좌측의 1번 포트폴리오 처럼 매우 위험한 포트폴리오에서 10번 포트폴리오처럼 매우 안전한 포트폴리오로 자연스럽게 비중을 조정해주는 것이다. 아래 두개의 펀드가 신흥국과 선진국 주식으로, 위험성이 높고 기대수익률도 높다고 치는 그런 자산군들인데 10번으로 갈 수록 비중이 점점 적어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TDF 의 문제는 이것을 미래 특정년도에 고정을 시켜둔다는 것이다. 예컨대 2025년부터 신흥국 주식투자를 줄인다고 사전에 정해두는 식이다. 시장이 그 사이 폭등을 했건 폭락을 했건 아무런 대응 없이 그저 십년 전에 정해둔 계획을 따르자는 것은 솔직히 말해 무지와 무능의 나쁜 조합이다. 마치 6살 난 자녀의 평생 취업계획을 하룻밤에 다 세워놓고 평생 그것만 지키고 사는 격이다. 게다가 평생 수수료를 지속적으로 내야한다는 것은 낭패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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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자연히 동적으로 대응하는 현명한 smart TDF 를 만드는 방안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매년 시장이 싼지 비싼지에 따라, 추세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분별하여 비중을 결정하되 장기적으로는 돈을 기대치 이상 벌면 챙기고 덜 벌면 조금 더 공격적으로 투자를 지속하여 장기적인 수익 기회들을 챙기는 방식으로 하면 된다고 봤다. 다만 이런 방법은 장기투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자리잡기는 시간이 좀 남았다고 봤다. 아래의 그림에선 저 비중을 나타내는 선 (glide path) 들이 시장에 따라 특정 폭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다. Dynamic glide path 라는 개념으로, 수년 내에 자주 접하게 될 개념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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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리스크 패리티(세계 최대의 헷지펀드 Bridgewater Associates 의 risk parity 모형은 지난 10여년간 큰 유행을 탔다)며, 경기 순환 모형 등 온갖 동적 시스템들을 다 분석해봤으나 깔끔한 답을 찾기 쉽지 않았다. 복잡성을 대단히 높이면 무슨 문제인들 풀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게 되면 고객이 이해를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쯤부터 전 팀원이 함께 수백편의 논문속에서 힌트를 찾아 헤맸다. 학계를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학계의 편의를 위해 내놓은 듯한 다소 현실성 없는 분석들이라 안타까웠다.

100조 원 규모의 구조화증권

2015년 8월 경부터 ELS (파생결합증권)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에 한국의 ELS 시장 규모는 100조 원이 넘어가고 있어 사실상 전세계 로보어드바이저 시장을 다 합친 것보다 수배 이상 컸다. ELS 라는 상품의 유행 요소는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그 안에 로보어드바이저의 미래에 대한 단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파생 상품 트레이딩을 해온 입장에서 잘 만든 구조화를 통하면 ‘적재적소’의 투자 응용 방법을 매우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계에 따라 특정 구간에서 원금을 일정 이상 보장할 수 있다는 점과, 시장의 움직임에 깔끔하게 연동되어 있다는 간결성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객관적으로 대중 투자자가 시장을 이기거나 프로들을 이길 수 있는 몇 안되는 상품이 ELS이다. ELS 발행 시장이 상당히 경쟁이 치열하여 수수료도 아주 낮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모든 ELS 가 훌륭한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어렵고 복잡해질 수 있는 파생결합증권 상품이다 보니 잘못 사용하면 예상치 못한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봤다. 다만 ELS 을 섞은 포트폴리오라면, 상방을 다소 포기하여 하방을 막아 일반 고객들에게 최선의 재무설계를 해줄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이때 적극적으로 깨닫게 된 개념이 행태경제학이다. 사람들은 -2%의 손실이 꾸준히 발생하더라도 보험 상품을 좋아한다. -100%를 막아주는 댓가이기 때문이랄까. 즉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일정 수준의 원금을 보전해주는 것의 가치가 10% 이상의 수익은 포기하는 가치로 환산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2% 수익보다 4% 수익을 두배 좋아하고, 8% 수익을 두배 좋아하고, 16% 수익을 두배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10% 손실이 반드시 -20% 손실의 고통의 절반은 아니다. 사람들은 작은 손실에도 큰 고통을 받고 큰 수익에도 무던할 때가 있다. 그러니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손익을 구조화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감정과 성향에 맞는 맞춤화는 정말 중요하다. ‘적절한 투자’라고 속여 사람들을 투자시켰다가 시장이 나쁘다고 -50%의 손실을 모두 감내해내라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방식인가. 게다가 일반인들은 시장이 엉망일 때 구조조정을 포함한 각종 사회적 고통에 함께 시달린다. 21세기라면 구조화에 대한 고민을 더 녹여낼 때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부합했던 것이 ELS 이다. 결국 모든 금융상품의 끝은 고도화된 구조화증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내 ELS 의 구조가 거의 획일적인게 아쉬웠다. 하단을 완전히 막아주거나 불 스프레드 (Bull spread – 초과 수익을 없앤 대신 일정 이상 하락 손실도 봉쇄하는 구조화 전략) 같은 방식으로 운용하는 ELS 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우리나라 ELS 시장이 독보적이다 보니까 세계 학계에서 ELS 에 대한 선행연구가 매우 미흡했다. 구체적으로 ELS 상품과 기존 자산군을 섞은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싶었으나 연구 논문이 단 하나도 없었다. 직접 하나 하나 연구하여 만들어나갔다.

그렇게 만든 것이 ELS리서치 라는 사이트였다. 장기적으로는 일반인들의 복합 금융상품 포트폴리오를 추천 제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각종 규제에 부딪혀 손발이 묶여 있긴 하였다. 오로지 한국 금융 소비자들의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주겠노라며 소수의 인력으로 좌충우돌하던 때이다. 이 즘에 금융을 전혀 모르겠다며 회사를 떠난 친구가 로보어드바이저 회사를 똑같이 차려버린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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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사이트가 ‘로보어드바이저’이냐?는 질문에 뾰족하게 답하긴 힘들었다. 로보어드바이저로 누군가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만 들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시장에서 어떤 방법으로 서비스를 제공해줘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확실한 것은 해볼 수 있는 일이 아주 많다는 것 정도.

알파고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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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초에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난다. 알파고의 등장이었다. 딥러닝 기술이 트레이딩이랑 맞아 떨어지는 바가 많아 우리도 많은 공부를 해오긴 했었지만, 이 기술이 재부상한지 불과 3~4년만에 바둑을 완벽하게 풀어낼 정도로 급격히 성장할 수 있을진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했던 바이다. 알파고가 충격적인 방식으로 바둑계를 점령하고 인간 지능을 위협하자, 너나할 것 없이 당장 투자나 투기에서 자신이 알파고를 만들었노라며 대중을 유혹했다. 모든 언론의 관심이 알파고와 (알파고일 것으로 예상되는) 로보어드바이저들에게 쏠려서 나도 걱정이 많았다. 환상에 의존한 광풍이었기 때문이다. 광풍은 반드시 깊은 실망을 동반한다. 우리만큼 깊이 있게 트레이딩과 딥러닝을 접목시키려 고민해본 팀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이 기술의 현 수준으로 구현할 수 없는 약속임을 알고 있었다.

2016년 중반쯤엔 금융위에서 알파고 열풍에 맞춰 본격 로보어드바이저 테스트베드라는 것을 만들어 무려 6개월에 거쳐 참여기업들이 ‘알파고’인지 검증을 하기로 한다. 하지만 수익률은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므로 운용로직은 공개하지 않고 평가하지도 않기로 한다. 다만 ‘알파고’인지, 혹은 Wealthfront 인지, 혹은 멋진 무엇인지 보겠다며 심사를 시작했다. 잘못된 가정이 많은 테스트베드였고 너무나 고생길이 예상되었지만, 참여 안했을 때의 불이익이 있을까봐 참여를 했다. 금융위에 대한 존경과 사랑만으로 참여했다고 해도 좋다.

이때 사용한 로직은 팩터 분석을 활용해 비중을 분산한, 역시나 단순 글로벌 분산투자 로직이었다. 대단히 대단하진 않지만 딱히 나쁘지 않은, 기존의 그 감동 없다는 알고리즘의 확장판 정도였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전 포트폴리오에 걸쳐 2~4등 수준으로 끝났다. 하지만 우리가 잘했다기보다 다른 팀들이 원채 이상한 로직들을 들고 와서 자멸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몇개 업체는 중도에 손실이 늘어나며 자진 퇴장했다. 팩터 투자만 썼어도 그런 손실이 났을 수 없을텐데. 팩터 투자는 미완의 학문이다. 그럴싸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하진 않다. 대응의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후 로보어드바이저 업계는 투자를 받은 회사 세군데와 그렇지 않은 군소 회사들로 구분이 된다. 투자 받은 회사들은 투자를 받을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쨌든 나름 ‘big3’라는 수식어로 차별화를 해간 것 같다. 우리 회사는 기관투자를 받지 않아 군소 회사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로보어드바이저들이 딱히 비지니스적인 성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쿼터백이 몇백억 원의 자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 그나마 성과라면 성과였고, 나머지 회사들은 은행과 손잡고 알고리즘 비슷한 것을 만들어주거나 웹사이트를 만들어주는 정도의 일을 하기 시작한, 완전한 태동기였다. 몇몇 회사는 적잖은 자금을 투자 받아 사람들의 관심을 샀으나, 어쩌면 그 후의 실망감이 커서 투자업계에서 더욱 로보어드바이저 회사에 대한 투자를 꺼리고 있을 수도 있겠다.

테스트베드의 시작 즘에는 곳곳에 사기꾼들이 보였다. “저는 기존에 시스템 트레이딩 만들던 사람인데요, 따지고 보면 이게 뭐 알파고 로보어드바이저죠 뭐 다른게 있겠습니까, 요샌 다 이렇게 부른다면서요?” 라는 이야기를 대놓고 하시는 분들도 많았다. 위험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는 시스템 트레이딩 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분들이 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투자에 실패해 고객 수수료로 연명하려는 수많은 하이에나들이 전국에서 궐기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동이 있는 투자 방법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2016년 7~9월에 팩터 분석 모델을 통해 테스트베드를 준비하면서, 그 ‘감동이 없는 문제’를 풀기 위해 계속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가 접한 것이 동적자산배분 학파였다. 동적자산배분은 진입과 대응의 문제를 아주 간단한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었는데, 내가 꿈꿔온 최상의 모델까진 아니었겠지만 그 간명함이 너무나 좋았다. Meb Faber 가 십년 전에 낸 A quantitative approach to asset allocation 은 역대 전분야 논문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며 전세계 퀀트들의 주목을 받았고, 같은 방법론을 수많은 사람들이 재검증하게 되었다. (우리가 번역한버전도 있다) 이 안에는 손절이나 팩터 분석법의 요지들이 거의 완전히 녹아있었다. 관련하여 다른 유명한 블로그나 논문들을 읽으며 확신이 생겼다. 일반인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세계 최대의 퀀트 헷지펀드 AQR 이나, 스승인 시카고대 노벨 경제학자 유진 파마의 효율적 시장가설을 정면 반박하며 거액의 자금을 운영하는 Alpha Architect 등의 글을 읽으며 오랜만에 나보다 지적으로나 운용적으로나 압도적인 고수들을 접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평생 추구해온 투자방법론을 일반인에게 제대로 전달하려면 당장 이만한 것이 없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블랙박스 알고리즘이 아니라 데이터로 수십년에 걸쳐 검증 가능한 방법론이라는게 마음에 들었다. 나를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는 분들이라도, 이 이론의 정수를 깔끔하게 이해하고 신뢰하여 수십년간 반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동적자산배분이라는 틀이 앞으로 모든 투자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다수 투자 방법론의 가장 큰 문제는 일반인이 견딜 수 없는 거대한 손실을 감내해야만 그나마 그리 높지만도 않은 장기 수익률을 낼 수 있다는 것인데 동적자산배분은 그 근간에 리스크 회피 장치들이 충분히 녹아있었다. 수익률도 장기적으로 단순 분산투자보다 훌륭했다. 아무리 뜯어봐도 반박할 여지조차 없는 투자방법론의 개선을 이뤄낸 것이다.

최소한의 투자와 운용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 방법론을 외면하기가 너무나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언젠가 모두가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면, 이 이론을 열심히 정리하여 많은 사람들한테 알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10월 경부터는 오프라인 세미나도 시작하여 요지를 알렸고, ‘할 수 있다! 퀀트 투자’의 강환국 님 등도 참여하여 처음 접해보는 방법론이라고 무릎을 치며 좋아하셨다. 이후 그의 책에도 일반인을 위한 최고의 전략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런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국내 로보어드바이저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해외에서 roboadvisor 2.0 이라며 resolve, Alpha Architect 등 몇군데가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모두 올해 수익은 불리오와 비슷하거나 높은 수준이었으리라 생각한다. (ETF 상품이 얼마나 다양한가에 따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훌륭한 기법이 다른 로보어드바이저들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을까?

첫째는 ‘인공지능’ 키워드에 대한 과도한 기대 때문이 아닐까 한다. 특히 금융 투자에 경험이 많지 않다면 어쩐지 알파고를 당장 시장에 도입해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접기 힘들다. 실제로 인공지능으로 투자의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면 어마어마한 시장이 되리란 생각이 들긴 한다. 허나 그것은 로보어드바이저가 대중을 위해 할 일이 아니라 일년에 몇천억원을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헷지펀드들이 먼저 이룰 수 밖에 없는 꿈이다.

둘째는 단순히 이러한 방법론 속에 내재된 장치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다양한 국내 기관 투자자들을 만나봐도 동적자산배분이 가지고 있는 장점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분들을 많이 봤다. 자기 돈으로 투자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리스크 관리의 구조와 필요성을 다 이해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자산군에 대한 투자의 의의를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코스닥 종목으로 월 10%를 벌 수도 있는데 굳이 자산군 투자까지 할 이유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시는 분들도 많다. 그런 분들은 스릴과 일확천금을 쫓기에 이런 방법론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고 이해하고 싶지만,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마저 마음을 열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2017년 말, 로보어드바이저 산업은 암흑기인가

개인적으로 이 업을 하면 할수록 로보어드바이저의 미래를 밝게 보게 된다. 이 업을 어둡게 보는 동종업계 사람들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세계의 자산관리 방법론이 디지털 혁신을 수없이 거칠 것이고, 그럴 수 밖에 없다. 그와 연루되어 있는 모든 기술을 로보어드바이저라는 신산업의 범주라고 불러도 좋다. 스타트업으로서 커가는 회사도 있겠지만, 대형사에 인수되어 기존 금융의 틀을 완전히 바꿔버릴 팀들도 많을 것이다.

우선 자산운용의 관점에서, 동적자산배분을 넘어서는 모델도 언젠가 나올 것이다. 동적자산배분이 아주 우수한 바둑 교재라면, 실제 바둑 기보들을 학습한 에이전트들이 새롭고 그럴싸한 미래의 금융 데이터를 수백만년 어치씩 만들어낼 날이 머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데이터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어서 일종의 금융투자 singularity 라는 임계점을 넘어야 한다. 그게 대량의 가상 데이터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이 나오기 시작하면 시장 안에서의 여러 주체들의 의도와 그들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제법 정교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된다. 트레이더로서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 거리는 영역이다.

자문의 영역에서도 대단한 발전이 있을 것이다. 로보어드바이저는 운용 기계이기에 앞서서 자문의 혁신이라고 생각한다. 의사들이 감기를 몇가지 증상을 통해 확인하지만, 일반인은 그 증상 별 가중치와 예외 사항을 잘 모른다. 5가지 정도의 증상만 확인해도 경우의 수는 많게는 수백가지가 될 수 있다. 이런 경우의 수들을 책에 전부 적어놓는 것은 너무 장황하고, 일반인들이 읽고 정확히 이해하기도 힘들다. 의사들끼리도 요약하여 가르치고 경험적으로 익히도록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 그 수백가지의 경우의 수를 다 나열하여 증상들과 비교하는게 꼭 못할 일도 아니다. 자문의 발전은 이렇게 다양한 상황과 니즈에 따라 고객별로 줘야할 최적의 자문을 기계적으로 뽑아주는 데서 시작한다. 물론 그 기계의 설계와 문구는 아직까진 사람의 손을 많이 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자신에게 맞는 자문을 빠르고 정교하게 구할 수 있다면 대단히 편리해질 것이다. 이는 챗봇 기술 등의 발전과 적용에 따라 점점 더 빨라질 영역이다. 절대 퇴화하거나 현상 그대로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자문과 운용 사이에서 체결을 더 간소화시켜주고 안정성을 높여주며 맞춤화해주는 기술들은 향후 수십년간 끝없이 쏟아져나올 것이다. 투자자가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인간적인 실수 때문에 불필요한 손실을 보고 슬퍼할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적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엄청나게 편리해지고 합리적이 될 것이란 이야기다. 투자라는 신화가 상당히 과학적으로 합리화될 것이란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 분위기는 어떤가? 로보어드바이저 산업의 폭발적 성장 직전에 우리는 작은 암흑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로보어드바이저 펀드들이 수익이 난 곳이 거의 없다는 것도 문제고, 실제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곳도 거의 없다는 것도 문제다. 최다 고객을 모시고 있는 불리오의 경우 이제 겨우 유료 자문 고객이 1400명 수준인데, 다른 모든 로보어드바이저를 합쳐도 아마 1000명이 안될 것이다. 증권사에서 알파고 직후 성급하게 쏟아낸 로보어드바이저들은 전부 다 처절하게 실패했다고 한다. 영혼 없이 짜낸 Wealthfront 아류들을 보면서 깊은 암흑기가 올 것이란 걱정은 했었지만 그 결과는 생각만큼이나 참담하다. 어떤 서비스는 가입자가 단 한명도 없는데 억지로 계속 마케팅비를 지출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혹자는 비대면일임업법이 통과 되어야 서비스를 할 수 있다며 규제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혹자들은 은행의 외주업체로 전락했다. 그마저도 은행 내부의 깊은 회의감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또 어떤 팀들은 인공지능으로 주가를 찍어줘 일확천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노라며 제법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어차피 지켜줄 수 없는 약속이라면 길게 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사기꾼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업계를 떠나고 있다. 초기에 인공지능을 이용해 연 10%를 매년 안정적으로 벌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이던 회사들도 몇달 해보니까 자꾸 손실만 쌓여 활동이 눈에 띄게 적어졌다.

하지만 2018년, 혹은 늦어도 2019년에는 로보어드바이저라는 키워드가 다시 한번 세상을 뒤흔들 것이다.  중국의 핀테크 업체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미국의 로보어드바이저도 커다란 변곡점을 앞두고 있다. 불리오 같은 팀들이 2년 연속 10% 수익률을 보여준다면 일반인들에겐 대단히 큰 대안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 인공지능 스피커나 여러 새로운 플랫폼에서 로보어드바이저들의 역할이 커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현존하는 로보어드바이저들이 그 주역이 아닐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금융시장에 남아 있는 비합리적 문제들의 갯수만큼이나 많은 혁신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불리오를 만들며 느낀 기회들

이런 간단한 동적자산배분 모델을 리포트 형태로 고객들에게 나눠주고 있음에도 고객들의 반응은 참 뜨겁다. 이토록 불편하여 죄송할 따름인데도, 고맙다는 반응과 심지어 ‘인생을 바꿔주었다’는 반응들을 들을 땐 우리가 뭐라 말씀드려야할지를 잊게 된다. 여러 복잡하고 골치 아픈 금융상품들을 열심히 공부하여 최선을 다해 투자하였음에도 항상 어처구니 없는 결과에 답답해했던 분들이다. 어떤 분은 불리오를 통해 여러 증권사 및 퇴직연금 계좌를 응용하여 투자할 수 있는 자료를 직접 만들어 주위분들과 나눠 읽고 함께 투자한다고 한다. 십년 묵은 만성적인 투자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었다며 우리가 의도하거나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불리오를 활용하시는 분들을 보면 거대한 시장의 흔적을 발견한다. 비단 불리오 자랑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온 일에 대해서 왜 이토록 해결이 되지 않았던가 하는 씁쓸함이 남고, 한편으론 이 업에는 얼마나 많은 잠재고객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우리만큼 고객들을 많이 만난 팀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고객이 대한민국에서 고객을 가장 많이 보유한 투자자문사만큼이나 많다. 불과 일년이 안된, 이토록 불편한 서비스가 말이다. 그러면서 고객들이 진짜 갈구하는 감정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준다는 약속이나, 화려한 언변이나, 정교한 기법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 돈은 언제 벌겠냐, 부자들이나 상대하라”며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지만, 그건 이 시장을 일선에서 느껴보지 못하셨기 하시는 걱정들이다.

투자 결정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그들의 옆에서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전문적인 조언을 해준다는 것은 그 누구라도 고마워할 일이란 것이다. 그게 전화를 통해서든, 모바일 창을 통해서든, 혹은 리포트나 무엇을 통해서든 관계 없다. 단지 수천명의 매니아를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 수백만 명을 위한 서비스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은 이유가 그것이다. 대중 투자자들의 고통과 실망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어쩌면 로보어드바이저가 아직 더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불리오가 생각보다 불편해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나아지는 만큼, 시장은 눈에 띄게 커져갈 것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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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오 개발기를 통해 본 로보어드바이저의 간략한 역사”의 2개의 생각

  1. 성대사랑의 천영록선배님이시죠? 도전적인 삶보다 안정적인 삶이 쉽다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셨던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고 제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게 우연찮게 다시 글을 접하게되어 정말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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