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와 가격의 관계를 이해하라

원문: 본인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juliuschun/221226726978

투자를 생각함에 있어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관념은 ”가격’과 ‘가치’의 관계’이다. 이들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투자의 초보이자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간단한 개념도 투자에선 무작위로 섞여 쓰이고 있어 정리가 필요하다. 정리만 잘해도 먼 길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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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투자 상품의 가격은 그 가치를 쫓아간다고 믿고 있다. 오를 부동산, 오를 펀드를 선택하는 것도 그 근저에 깔린 ‘가치’를 헤아림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무척 자연스러운 관점이다. 지식인으로서 사회 경제의 현상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투자에서도 그렇게 접근한다.

반면 시장을 조금 봐온 사람들은 가격은 수익을 주는 ‘독특한 패턴’이 있다고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이들은 가치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도 한다. 소위 기술적 분석과 패턴을 알기만 해도 돈 벌기 쉽다는 주장도 있다. 주식으로 X 억 벌기, 같은 책을 보면 대부분 이런 내용이다.

가치인정여부

이 두 진영이 서로의 의견을 부정하기 위해 온갖 반론들을 쏟아낸다.

가치를 계산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두 부류다. 한 부류는 모든 가격 움직임이 무차별하므로 패턴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고, 결국 가치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한 부류는 현재의 가격들이 특정한 뉴스의 변화로 인해, 경제적 효과의 변화로 인해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투자의 ‘이유’를 공부하고 분석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두 부류는 가치를 공부한다는 점만 비슷할 뿐 서로 완전히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반면 가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도 두 부류다. 가치를 봐도 전혀 가격을 예측할 수 없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분산 투자해야 한다고 믿는 부류가 하나이고, 가격 자체의 움직임에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고 믿는 부류가 또 하나이다.

가격가치4분류

이렇게 네 개의 관점이 싸우고 있다. 초보자가 이 네 부류를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면 혼란에 빠질 것이다. 첨예하게 다른 관점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과서에도 이들 내용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거나, 최소한 한쪽 관점을 강력하게 지지하지조차 않는다. 이들 관점의 대가들을 보자. 익숙한 사람들일 것이다.

첫 번째 부류는 워런 버핏이나 국내의 이채원 부사장 등으로 대표되는 가치투자자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가치 있는 투자가 돈을 벌 것이라는 관점이다. 장기 수익률이 이를 증명한다.

두 번째 부류는 애널리스트들과 금융업계 종사자들로 대표된다. 좋은 뉴스가 나오면 기업의 가치가 변할 테니 가격에 바로바로 반영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물론 나머지 모든 부류는 이 의견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하지만 일견 일리가 있고 상식적으로 보인다.

세 번째 부류는 인덱스 펀드의 아버지, 뱅가드의 창업주 존 보글이다. 어차피 1,2,4번 부류가 사기꾼 투성이니까 저렴하게 분산 투자해서 중간이라도 가자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최근엔 워런 버핏도 ‘딴짓하지 말고 인덱스 펀드만 사시라’라는 이야기를 한다.

네 번째 부류는 가격 패턴을 통해 단기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조지 소로스로 대표되는 트레이더들이다. 트레이더들 중에는 나머지 부류의 장점들을 두루 활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트레이더가 아닌 사람 중에 가격 움직임 안에 패턴이 있음을 주장한 사람은 거의 없다. 최근까진 학계 사람들이 이 네 번째 부류의 이야기를 인정한 적이 없어 일종의 도시 전설처럼 실체가 불분명했다. 최근에서야 충분한 양의 데이터가 확보되고 연구가 쌓이면서 학계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예전엔 ‘차트 분석가’라고 불리기도 했고 ‘기술적 분석가’라 불리기도 했다. 사기꾼들도 많은 편이다.

이에 대해 나와 수많은 트레이더들의 결론은 아래와 같다.

장기적으로 가격과 가치는 강력한 관계가 있지만, 단기적으론 거의 없다.

가격가치비교1 (2)

가격과 가치는 많게는 2~3년의 기간 안에 서로 동행한다는 보장이 ‘거의’ 없다. 가치는 가치대로 움직이고, 가격은 가격만의 춤을 춘다. 그러니 당장 가격과 가치가 함께 동행하리라는 일련의 논리를 들을 필요도 없고 시간을 쏟을 필요도 없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거나 FTA가 맺어진다고 그에 반응해 시장이 엄청나게 움직이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특히 첫 번째나 두 번째 부류가 순간적으로 그 말을 믿고 주식을 많이 사면 가격이 춤추기도 한다. 하지만 대다수 투자자는 가치를 보지 않거나, 각자의 가치체계를 따로 가지고 있다. 분초를 다투며 시장이 움직이는 이유는 가치나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두 달 간의 움직임도 역시 경제적 이유가 아니다. 예컨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주식 투자 세력 중 하나인 국민연금이 실시간 뉴스 보고 주식 비중을 늘리는 경우는 없다. 가격이 오르면 좀 팔고, 가격이 내리면 좀 사는 것을 근본적으로 반복한다.

언론이나 증권사에서 경제적 이유를 들먹이며 가격 움직임을 설명하는 것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쏟아내는 궁색한 변명이 대부분이다. 시장을 설명하는데 억지로 갖다 붙일 수 있는 경제적 이유는 하루에도 수천 개가 쏟아진다. 아무거나 갖다 붙이면 그만이고, 실제로 그렇게 아무거나 갖다 붙인다. 예컨대 삼성전자가 높은 실적을 발표했는데 장이 오르면 ‘높은 실적에 의해 장이 올랐다’고 하면 그만이고, 장이 빠지면 ‘높은 실적을 발표하자 수익 실현으로 장이 빠졌다’고 해석하면 되고, 장이 안 움직이면 ‘높은 실적 발표에도 불구하고 장은 반응이 없었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매일 오후에 언론이 하는 일이다. 아무 지적 능력이 필요 없는 행위이므로 인공지능으로 대체가 시급하다.

그러나 3년 정도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 가격은 가치 변화의 압도적인 영항을 받는다. 우주가 만유인력으로 돌아가듯이, 성장하거나 하락하는 가치는 중력처럼 가격을 이끌어낸다. 예컨대 올해 배당이 1만 원인 주식이 5년 후에 배당을 100만 원씩 한다면 가격이 이를 결국은 반영할 것이다. 얼마를 반영할지는 유추가 가능하지만, 그 3~5년이라는 시차 때문에 정확한 유추는 어렵다. 심지어 회사의 오너나, 회사 전체를 인수하려는 사람도 회사의 합당한 가격을 정확하게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가격과 가치는 장기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동행하려는 성질이 대단히 높아진다는 것만 알면 된다.

가치와 아무 상관 없는 가격의 패턴도 존재한다. 가격은 가격만의 춤을 춘다고 했으니, 그 춤 안에는 복잡하고 기괴한 형식들이 존재한다. 다만 찾기가 쉽지 않다. 가장 두드러진 패턴은 방향성을 지속하려는 ‘관성’이지만, 이러한 관성도 단순히 이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관성에 역행하는 ‘평균 회귀’의 성질은 이상한 가격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강력한 힘이다. 결국, 단기적으로 보면 가격은 ‘거의 무차별’하게 움직이는 변덕쟁이이고, 장기적으로는 ‘가치’라는 부인에게 끌려가는 말 잘 듣는 남편이다.

이를 워런 버핏과 그의 스승은 ‘변덕쟁이 미스터 마켓’이라는 인격체로 표현하였고, 케인즈는 ‘단기적으로 시장은 미인 선발 대회의 다수결 표 싸움 같고 장기적으로는 계량기 같다’고 이야기했다. 정치인의 평가가 단기적으로는 인기투표와 감성에 의해 좌우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결론은, 부류를 믿고 싶으냐에 따라 따라야 할 규칙이 다르다는 것이다.

가치투자를 할 것이면 절대로 단기 투자성과를 기대하면 안 된다. 그런 작동 원리가 아니다. 반면 공부만 열심히 하면 일반인도 80% 이상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 가치투자이다.

인덱스 펀드를 통해 장기적인 분산투자를 하려면 장기적인 비용 절감만 생각하고 나머지 모든 것은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기술적 분석을 하려면 뉴스나 정보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철저하게 패턴에만 집중해라. 일반인이 기술적 분석을 취미로 연구해서 성공할 가능성은 1%가 채 안 되니,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 반면 단기투자는 가치분석을 통한 장기투자로 연결시킬 생각은 추호도 하면 안된다. 졌을 땐 진 것을 빨리 인정하라. 물려 있다고 갑자기 경제 논리를 운운하며 헛소리를 시작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부류로 소개한 뉴스 분석 투자를 하려면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공부를 하면 된다. 그러나 이를 통해 투자에 성공하는 전문 투자자는 흔치 않다. 가격과 가치가 단기적으로 큰 연결고리가 없다는 전제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거나, 단순히 단기 수급 단타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간단한 이치 같아서 맥이 빠질 수도 있지만, 이 관계성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오죽 힘들면 앞서 설명한 네 개의 부류가 각자 자기주장을 하며 수십 년간 싸우고 있겠는가. 이 관계를 명심하면서 다른 이론들을 접하면 참고가 많이 될 것이다.

재밌는 논문 요약 – 투자자문인에게 이해관계의 상충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The Misguided Beliefs of Financial advisors – Juhani T.Linnainmaa et al (2017)

https://papers.ssrn.com/sol3/papers.cfm?abstract_id=3101426

재밌는, 아니 웃기는 논문을 발견했다.

요약을 살펴보자.

소매 금융에서는 일반적으로 투자자문인과 고객의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인해 높은 비용 (손실)이 발생한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자문인과 고객의 매매 패턴에 대한 자세한 데이터를 분석하자, 자문인들이 고객과 똑같이 투자한다는게 드러난다. 자문인도 잦은 매매를 하고, 단기 수익률 추종을 하고, 고비용의 액티브 펀드를 선호하며, 자산이 잘 배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자문인들의 연 평균 -3%의 수익률은 고객들의 수익과 비슷하다. 자문인들은 고객에게 특정 포트폴리오를 추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같은 포트폴리오를 들고 있진 않은 것 같다. 자문인들이 해당 산업을 떠난 후에도 계속 같은 방식으로 매매하기 때문이다.

재밌다. 알고는 있었지만.

 

서문 및 본문 요약

약 400만 명의 미국 가계가 투자자문인에게 자문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직접 자문료를 받지 않고 판매 수수료 등을 받는 행동으로 인해 이해관계의 상충이 발생해 최근 제도가 많이 바뀌고 있다. 하지만 이 논문에서는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자문인이 고객에게 제시하는 포트폴리오에 스스로 동의를 하긴 하지만, 사실은 자문인 스스로가 잘못된 관점으로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객의 돈이든 자기 자신의 돈이든, 패시브 투자보다 상당폭 낮은 수익률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해관계의 상충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정책 당국이 원하는 효과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약 4000명의 자문인과 50만 명의 고객의  1999년부터 14년간 거래 데이터를 분석했다. 약 20조 원의 자금을 운용하는 Mutual Fund Dealer (MFD – 가계 자산의 55% 정도인 400조원의 자산 규모를 가진 채널) 를 분석했다. 자문인 스스로의 거래 패턴까지도 확인했다. 고객과 자문인 모두 나홀로 투자족과 똑같은 투자 실수들을 보이고 있다. 특정 자문인과 고객들의 거래 패턴은 비슷하다. 반면 고객과 다른 자문인과의 거래 패턴은 상이하다. 자문인의 거래 패턴은 자문인이 은퇴하고 나서도 본인의 계좌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난다. 즉, 딱히 고객을 속일 의도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럴 참이었다면 고객 계좌보다 본인 계좌의 수익률이 더 높은 경향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니 자문인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시장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첨언

자문을 받는 고객 중에 40% 정도는 실제 수수료를 제하면 연간 0.2~0.5% 까지도 알파가 발생했다. 다만 수수료 2.5% 이상을 떼고 나면 전부 알파가 마이너스다. 제일 잘한 십분위 수익률이 -2% 이상 시장 수익률보다 저조했다는 것이다.

이런 자문인들을 돕고 싶다. 어차피 상위 2~3%를 제외하고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 시장이 그렇게 생겨먹었다. 특히 영업활동을 겸하면서는 포괄적인 투자 전략을 만들기 어렵다.

우리나라에도 수십만 가구가 자문인의 손에 자산을 맡겨놓았으리라 생각한다. 증권맨, 보험맨 등 금융인들이다. 좋은 대학 나오고 멋진 양복과 화려한 화술을 연마한 그들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장품은 한두번 잘못 골라도 인생에 큰 탈이 없지만, 자문인을 잘 고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늘 얘기하지만, 투자를 전업으로 꿈꾸는 백명의 트레이더 견습생이 입사해도 95명 이상은 실패한다. 시장에 숨겨진 암초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직을 고민 중인 서른 즈음의 후배들에게

겨울이 지나갈 때쯤 이직에 대한 상담이 많이 옵니다. 최근에는 입사지원서 혹은 자기소개서의 형태로도 많이 들어오는 이런 편지들을 읽으며 대견한 후배들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언제쯤 우리도 저런 인재들을 마음껏 뽑을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한 분이 쓴 긴 편지의 끝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울분을 토해내듯 글을 썼습니다. 그것은 제 지난 삶에 대한 후회이기도, 제 무능에 대한 분노이기도, 제가 품은 꿈에 대한 간절함 이기도 합니다. ”

아마 30세를 전후한 분들은 많이 공감하실 내용인 것 같애요. 어느 모임자리에 갔더니 젊은 대표님께서 제 글을 지인들과 함께 돌려읽기도 한다고 하시더군요. 30대 전후의 갑갑함에 많은 위로가 된다며 두번 세번 반가움을 표현했습니다. 왜냐면…. 30대 전후의 갑갑함에 관심을 가지는 선배가 별로 없기 때문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갑갑했으니까요.

우선 한시대를 앞서 산 선배, 또 같은 시절을 먼저 보내고 좀 더 멀찍이서 회상할 수 있는 선배의 입장에서 여러분의 입장을 한번 객관적으로 나열해볼게요.

여러분은 그 어느 때보다 재능이 뛰어났고, 다양한 문물을 경험하였고,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었던 세대입니다. 인터넷이나 게임에 접속만 하면 또래와 지역을 초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머리속에 쌓인 무의식의 원석은 그 누구보다 많은 세대입니다. 특히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친구들은 나름 대한민국에서 뜻 있고 생각있고 한때는 조명 받았던 젊은이들일 테니 그런 지적 섭취에 부지런했을 것입니다. 역사나 철학 등 인문학적 지식에 허기를 느낀 분들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반면 오프라인에서 다양한 세대를 만나고 동네에서 거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데는 서툴렀습니다. 도시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관계망의 결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비단 후배 세대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더 큰 외로움 속에 더 큰 동질감을 찾고 있지만 자주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생각이 많은 청춘기에 그런 어지러움을 맛보는 것은 더 큰 방황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기회는 보이고, 이야기는 들리는데, 만져지는 것은 없는 가상현실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획일화된 교육의 폭력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제법 자신의 길을 가는 동료들을 많이 구경하였습니다. 게임 방송을 하며 돈을 버는 친구는 물론 아버지 가게를 물려 받거나 해외로 이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획일화된 폭력적 질서라면 그것만 따르면 그만인 것을, 한쪽에선 획일화를 논하고 한쪽에선 다양성을 요구하니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어쩌면 대다수는 이미 획일성에 베팅하였을 것입니다. 대기업을 들어가고 어머니가 창피하지 않을 어떤 주어진 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의탁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양성이라는 바람에 돛을 걸고 멀어져가는 지인이나 선배들을 보며 아찔함을 느낄 것입니다.

어느 길을 택하는지가 그 길 위를 얼마나 열심히 달리는지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설계를 결정하는 사람이 그 설계를 만들어내는 사람보다 더 큰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목격합니다. 부정할 수 없을만큼 자주 목격하고 맙니다. 그리고 주위에 선배들은 어쩐지 설계를 포기했다는 생각에, 그들의 조언이 더 헷갈리기만 합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해보기엔 내 안에서 열정의 실마리를 찾기 힘듭니다. 저 정도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를 자문해보면, 불현듯 주위에 인생을 말아먹은 돈키호테들의 이름이 순식간에 떠올라 불안합니다. 그러나 무의식 중에 압니다. 안전한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그 자리는 점점 더 불안해질 뿐이라는 것을. 선배들의 우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었으니깐요.

우리 아버지 때엔 사실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인생역전의 길이었습니다. 삼시세끼 해결하기 어렵던 시절에, 녹봉을 먹는다는 것은 대단합니다. 시골에 가면 자녀가 나랏일 한다고 하면 집 앞까지 포장도로를 깔아줄 수도 있는 절대권력자 마냥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상위 0.01%의 대성공이었겠죠. 그 누구도 공무원보다 높은 자리를 상상하기 힘든 때였습니다. 하지만 더욱 고성장시대가 전개되자 민간 기업의 회사원이 공무원보다 돈을 훨씬 더 벌기도 합니다. 대학을 나와 회사원이 된 것에서 대박의 기회를 찾은 것입니다. 삼시세끼를 넘어 해외 출장도 가고 자동차도 사고 집도 사고, 어떤 미래를 상상했든 실제 현실은 더 크고 아름답게 변화해갔습니다. 대박이었습니다. 회사에 붙어서 충성을 맹세하면 새로운 부서가 생기고 새로운 자회사가 생기고 새로운 거래처가 열릴 때마다 더 큰 일을 할당 받았습니다. 한두번 찍혀도 회사안에 찬란한 미래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한민국 대부분의 대기업이 구글 입사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대학 진학률이 6배 이상 올랐습니다. 대학의 가치는 1/6 토막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대기업의 가치도 떨어졌습니다. 고성장시대에 이뤄지던 기적들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지금의 구글은 십년전의 구글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아버님 때의 신화와 전설이 귓전을 울리지만, 영광의 순간을 기억 못하는 선배들의 얼굴이 묘한 이질감을 줍니다. ‘회사 때려쳐야지’를 밥먹듯 중얼거리는 대리 과장 선배들을 보며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나의 희생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를 진지하게 자문하고 있을 것입니다. 고성장 시대에 올라탈 수 있던 기업내 사다리는 모두 치워진 느낌입니다. 있다 한들 아무도 그것을 믿고 올라타지 않습니다. 같은 사다리 위에 밍기적 대는 엉덩이가 너무 많아 교통체증이 입니다. 사다리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30대 즈음에 느끼는 막연함 아닐까요? 내 갈길을 갈 것인가, 간다면 길이 있긴 한 것인가, 그냥 있을까, 그냥 있으면 길이 있긴 한 것인가. 그때쯤 생각나는 것은 역시 이직입니다.

이직에 대한 저의 생각은 첫째, 한번은 해보길 추천한다는 것입니다. 이직을 하면 아주 조금이라도 후회가 생길 것입니다. 더 악화되는 것도 많고, 완전히 똑같은 것도 많겠죠. 그러나 확실한 것은 ‘관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비교대상이 있기에 자기 객관화가 가능해집니다. 기업들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 수 있는지를 알게 되죠.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쁘지 않습니다. 평생 이직을 고민하며 제자리에 앉아 있는것보다 낫습니다. 답이 안 보인다면 한번쯤 자리를 옮겨 내가 찾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재정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옮겨보니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출발, 새로운 삶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직한 사람들의 만족도가 대단히 높진 않더라도, 만족도는 평균적으로 제법 높은 편입니다. 무엇보다, 공채로서 아기로서 평가 받다가, 경력직 프로로서 평가 받게 될 때, 내 안의 프로가 눈을 뜨게 됩니다.

두번째, 그래봤자 사실은 멀리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상위 5% 수준의 인력을 뽑는 회사에서, 상위 4.9% 수준의 인력을 뽑는 회사로 옮겨도, 문화의 차이가 그렇게 많이 발생하지 않고 대우의 차이가 그리 많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기회의 폭은 비슷하고 인재에 대한 생각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그래서 이직에는 환경의 변화를 요구할 협상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2~3년 경험이 있을 때 그 경험을 내세워 이직하는 것이 (실력 대비) 몸값이 좋습니다. 기존 연봉의 20%는 더 받아야 이직의 조건이 달성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 협상은 좋습니다. 반면, 대기업 3년차 정도의 회사원이라면, 연봉을 획기적으로 깎는 협상도 좋습니다. 한번 찍은 연봉은 모종의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은근히 좋은 협상 카드가 됩니다. 반면 여러분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고 열정이 있고 배움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관된 경험이 없을 수 있습니다. 다른 회사에서 익힌 사회경험을 토대로, 경력 없는 경력직으로 이직하되 연봉을 많이 양보하세요. 높은 연봉을 받아본 적이 없다면 ‘양보’랄 것도 없지만, 그런 적이 있다면 ‘양보’가 됩니다. 또한 대단한 열정의 시그널이 되기도 합니다. 대단히 갈망하는 회사에 희망연봉을 반토막으로 양보하고 지원해보세요. 어차피 3년차에 연봉은 배움에 재투자해야할 돈입니다. MBA 가는 돈이라 생각하고, 오로지 배우기 위해 새로운 직업을 가져보세요. 그러나 계산은 해봐야죠. 이 새로운 직업을 통해 커리어를 제대로 쌓는다면 10년 후에 기존 회사 10년차만큼 받거나 사실은 두배 이상 많이 받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용기를 낼 필요도 있습니다. 대부분 즐거운 일을 하며 맨땅에 헤딩하면 더 행복하고 더 경제적으로 풍족한 미래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차피 기존 회사 10년 다닌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행복할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대신 힌트라면, 연봉은 깎되 직급은 지키거나 높이세요. 더 많은 권한, 더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자리를 연봉을 양보해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사가 성장하면 그 암묵적 지분을 요구하면 됩니다. 일종의 투자인 셈이죠. 투자가 없으면 투자 수익도 없습니다.

일반적인 이직에서 10인 수준의 스타트업 이직은 권유하지 않습니다. 규모가 크더라도 성장이 멈춘 중소기업도 비추합니다. 직무를 배우고 싶다면 대기업 안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부서에 지원하시고, 직무를 배웠는데 적용하면서 더 배우고 싶다 하면 한 30~50명 수준에서 급격히 커지고 있는 회사가 적정합니다.

물론 객관적인 의미에서 사내 기회의 폭은 이직시에 오히려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다만 더 배우고 더 다양한 기회를 탐색하기 위한 이직, 나의 50년 업을 찾기 위한 이직이라면 좋습니다. 대기업은 언젠가 해체되거나 붕괴됩니다. 대기업의 체제 안에서만 생각하지 마시고 다양한 기회를 탐색해보시길 바랍니다. 결과적으로 대기업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더라도 말이지요.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 대해 또 나에 대해 더 배워야만 행복해집니다.

요새 사람들이 주인의식이 없는 건 주인인체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는 아닐까

요새 사람들이 회사일을 자기일처럼 생각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 윗사람들이 너무 회사일을 자기 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나는 회사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싶었는데, 선배들이 ‘우리는 용병일 뿐이다, 이딴 회사 망하던가 말던가 내 알 바 아니고 기회될 때마다 딴 데로 옮기는 것이 전문직의 덕목’이라고 배웠다. 나도 결국 회사를 네 군데나 다니고 창업하였으니, 선배들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행동하면서도 결국 대부분의 경우의 수를 다 섭렵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경영자로서 우리 팀원들이 회사일을 남일처럼 생각한다면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실제로 남일인건 둘째치고… ‘주인의식’이라는 자발적 초인성을 갖춘 인력이 부족할 수록 기업으로서 조직으로서 팀으로서의 위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좋건 싫건 자발적 초인성은 ‘주인의식’에서 밖에 나오지 않고, 그 자발적 초인성을 갖춘 인재와 갖추지 않은 인재의 생산성은 어마어마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 어쩔 수 없다. 일주일에 백시간 고민하는 사람은 일주일에 40시간 고민하는 사람보다 적게는 2배를, 많게는 수백배를 해낸다. 자면서도 회사가 처한 환경 속에서 해법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수면 중에 무의식이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하고 알고리즘을 짜서 더 정교하고 고차원적인 해법을 들고 나오는 이런 열정과 에너지의 누적을 이길 것은 인간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그런 인재의 중요성을 모를 경영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의식이 부족한 세태는 비단 요새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마도 수천년전부터 내 일이 아닌 것을 내 일처럼 느끼는 사람은 소수였을 것이고, 그들이 소중하고 귀한 인력이었다는 것은 차치하고 결국 그런 것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도 아닐 것이다. 어느 무책임한 회사원이라도 자기 손으로 운명을 오롯이 개척해야 하는 상황에선 흥이 돋고 집중력이 껑충 뛰기 마련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개인사업자나 창업자가 직장인보다 훨씬 진화적으로 자연스럽고 본능적으로 행복하다. 우리가 수만년을 개인사업자처럼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에게 즉각적인 보상이 보이지 않는 일, 남에게만 즉각적인 보상이 허용되는 일을 내 일처럼 하기는 여간해선 쉽지 않다. 나에게 물질 혹은 비물질적인 지분이 없다고 느낀다면 누구도 지분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요새 사람들이 유독 더 회사일을 남일처럼 생각한다고 하는 것일까.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러기 더 쉬워진 환경인 것은 확실하다. 경제 구조의 변화로 인해 더이상 자본집약적인 대기업의 건물 조직 네트워크 브랜드의 컴비네이션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란걸 사람들이 눈치채서, 젊어서 대박나는 사람이 주위에 워낙 많아서, 회사원 외에도 경제활동의 기회가 많아서, 젊어서부터 너무 경쟁사회에 지쳐서, 기업환경 대비 노동 유연성이 부족하여 그것을 악용하기 위해, 근로소득으로 팔자 바꾸기 상대적으로 어려워져서, 성장환경이 유복해서 가난 탈출의 욕망이 덜해서, 엘리트 직장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서, 이직이 쉬워져서, 해외로의 이민이 쉬워지고 삶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져서, 다른 기업문화와 비교가 쉬워져서, 놀거리가 많아져서, 주인의식 있는 직장인들의 좌절을 수십년간 목격한 학습효과 때문에, 전문성에 대한 열망이 많아져서, 르네상스적이고 T자 혹은 ㅠ 자 형 인재의 필요성이 부각돼서 다른 학습을 하느라, 조직 문화가 너무 과거지향적이어서, 정작 ‘윗사람’등의 롤모델이 사회적으로 뒤처져 있어서 등등 이유는 많을 것이며 또한 늘 그렇듯 복합적일 것이다. 한마디로 타인의 지분에 대한 주인의식의 수요가 현격히 떨어졌다.

너무 거시적인 환경의 변화라 대응할 여지가 없어 보일 수 있다. 스타트업을 하는 수 밖에 없나? 하지만 미시적인 문제도 있다. 바로 예전에 비해 ‘윗사람’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윗사람들이 내 아버지보다 도시적이고 부유하고 전문적이던 시절에서 이제 대개 내 아버지만 못한 사회가 된 것은, 고도성장기가 끝났기 때문이지만, 그만큼 윗사람들도 열정과 주인의식이 부족한 시대가 되었다. 윗사람들이 자기 몸 건사하기가 상대적으로 매우 어려워진 면도 있다. 더군다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나 의리, 맹목적 믿음도 굉장히 큰 폭으로 흔들리고 있다. 한마디로 불안 불안한 윗사람들의 모습이 아랫사람의 열정 부족의 가장 큰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윗사람들은 ‘나 때는 회사에 대한 주인의식이 있었고 지금도 넘쳐난다구!’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조금더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리더쉽’의 일반적인 문제다. 회사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회사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을 ‘자기의 이해관계’ 선상에서만 생각하는 리더에게 동참할 사람은 별로 없다. 모든 리더쉽은 공동의 목표를 공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리더 개인의 이해관계는 남들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부딪힐 가능성도 적지 않다. ‘내가 승진하기 위해서’ 이뤄지는 목표가 더 거대한 목표의식을 뛰어넘는 분위기라면, 이런 업무들은 팀원 개인을 착취하는 형태로 밖에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모든 리더쉽에 대해 똑같이 얘기할 수 있다. 예컨대 육아의 리더쉽이 있는 애기 부모가 배우자에게 ‘이렇게 함께 육아에 참여하면 아이들도 즐겁고 당신도 즐겁고 행복한 가정이 될 거야’라는 큰 틀의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나 힘들어 죽겠는데 불공평하니까 너도 고생해봐’라고 이야기한다면 리더쉽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리더쉽을 가지고 있는 배우자가 ‘열심히 일해서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보자’라는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내가 돈 번다고 얼마나 힘든지 알아?’ 라며 자신의 이야기로 팀의 성취를 국한시킨다면 주인의식에 대한 지분이 생기기 쉽지 않다. 엄마가 아이에게 ‘니가 공부 못해서 내가 얼마나 마음 고생인지 알아?’ 라는 말도 마찬가지고, 중대장이나 팀장이 ‘너희 때문에 내가 너무 고생이다 나도 승진 좀 하자’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 팀원의 이해관계가 배려 받지 못하고 오직 지배자의 편의를 위해 만사가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 주인의식이 생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남의 게임에 대한 강요인 셈이다. 본격적으로 팀장과 팀원의 대결구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함께 성과를 전부 나눌 수 없다면, 함께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공감대라도 만들어져한다. 주인의식이 생길만한 목표의식의 주인으로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다소 엘리트주의적이라 할 수 있지만, 조직의 모든 문제는 윗사람 책임이고 관리자의 특정한 행동 부족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요새 사람들이 주인의식이 없는 것은 중간관리자가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이고 그럴싸한 주인의식을 아랫사람에게 공유해주지 않는 리더쉽 부족의 문제다. 주인인 척만 했지 진짜 고민은 없었던 거시다. 궁금하다면 대표이사나 오너에게 물어보면 된다. ‘저희는 주인의식이 있는 것 같나요?’ 이런 고민을 안하는 중간관리자야 말로 자기가 주인 아니라고 회사내의 권위를 사적으로 악용하는 것 아닌가 싶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목적의식과 비전에 굶주려 있는지 모른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문제야.

99%의 저수익 투자자를 위한 조언

2년 이상의 투자 수익률이 연 5%가 안되는 사람은 99%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리스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리스크는 검도로 치면 방어구이다. 연 5% 수준의 수익률은 초급자용 대련 상대에게 점수를 따는 것과 비슷하다. 어림잡아 열에 일곱명은 대련 중에 한대라도 맞을까봐 방어구를 과도하게 착용하여 검을 휘두르지 못하는 수준이고, 나머지 세명은 방어구를 전혀 착용하지 않아 한대 맞고 병원에 실려가고 만다. 이렇게 병원에 실려가는 사람을 보며 다시 나머지 일곱명은 대련의 의지를 잃기도 한다.

이를 나는 ‘포물선 문제‘라고 하는데, 특정한 투자 기법은 리스크를 많이 가져갈 수록 포물선 같은 장기 기대수익률이 만들어지게 된다. 과도한 리스크는 포물선이 수면 아래 내려와 수익을 낼 수가 없다. 포물선의 시작은 예적금 수익률이고, 잠시 수익률이 리스크에 비례하여 올라갔다가 리스크가 늘어나며 급격히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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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산수라고 생각해도 좋다. 주사위를 던져 앞면이 나오면 -90%, 뒷면이 나오면 100%를 버는 게임이 있다고 해보자. 즉 100원을 걸어 지면 -90원을 손해보고 이기면 +100원을 얻어가는, 상당히 유리한 게임이다. 전재산 1억 원을 걸어 앞면이 세번 나오고 뒷면이 세번 나오면 내 재산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 1억 -> 1천만 원 -> 1백만 원 -> 10만 원. 세번 손실만에 -99.9%가 되었다. 이제 세번 연속으로 이기면 10만 원 -> 20만 원 -> 40만 원 -> 80만 원이 된다. -99.2%의 손실이다. 순서가 바뀐다고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 1억이 8억이 되었다가 8천만 원, 8백만 원, 80만 원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만약 1천만 원씩 여섯번 베팅 했으면 -90만 원의 결과가 세번,  +100만 원의 결과가 세번 이뤄져서 오히려 수익을 냈을 것인데 말이다. 한마디로 리스크를 너무 크게 가져가서, 만회할 수 있는 원금을 잃고 기회마저 날린 셈이다. 리스크가 클수록 똑같은 전략도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이를 도박가들 사이에선 켈리 공식이라고도 부른다. 그보다 무서운 것은, 큰 리스크를 목격하면서 엉뚱한 결정들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됐든 리스크가 적정선을 넘어서면 그 전략은 마이너스를 부르는 전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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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우리나라의 금융자산의 90%이상이 예적금으로 투자되고 있다는 엄청난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주위의 과도한 모험주의자들의 실패를 바라본 우리나라 대다수의 국민은 리스크를 전혀 가져가지 않는 경향이 있다. 포물선의 최고점을 ‘안전성 대비 최대 수익률’ 줄여서 ‘안전 수익률’이라 해보자. 이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원금이라도 유지하자는 보수적인 전략을 쓴다. 또한 과거에 고금리이던 시절의 습관, 혹은 부동산 투자에 대한 열정 때문도 있을 것이다. ‘주식하면 망한다’ 같은 이야기도 사실 위의 사례를 보면 일리가 있다. 포물선의 고점을 넘어서면 기대수익률은 ‘망하는 쪽’으로 가는게 맞기 때문이다. 망하지 않고 득이 될만큼 투자하는게 정말 어려운 일인 셈이다.

투자의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 안전 수익률의 균형에 대한 감을 알려줄 사람을 만난다는 의미이다. 프로 트레이더들도 마찬가지다. 실력을 연마하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초창기 3년 정도 실력을 쌓는 동안 그 세월을 버텨낼 리스크의 균형점을 알 수 없다면 불안감에 쌓여 과도한 베팅과 과소한 베팅을 오가며 방황할 뿐이다. 결국 그럴싸한 시장괴담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만다.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은 좋은 스승을 만나 그 스승이 옆에서 나의 베팅의 과대함이나 과소함을 지적해준 것이다. 나머지는 제자가 알아서 배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학습의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았다면 포물선 아래로 떨어져 금치산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옆에서 ‘과도하다’, ‘너무 적다’를 알려줄 사람을 한명이라도 만들어놓는 것이 좋다. 어쩌면 멀리서 찾지 않더라도, 배우자나 부모나 혹은 자녀가 그것을 논의해줄 가장 좋은 상대일 수도 있다. 굳이 고수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대부분 과도한 리스크를 감내하는 배포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주위에 쉬쉬하거나, 주위의 의견이 과도하게 보수적이어서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고 느끼거나 하는데, 좋은 투자는 옆에서 지켜만 봐도 좋은 투자라는 것을 납득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한달 만에 한달 수익 이상이 손실날 수 있다면 (혹은 수익이 날 수 있다면) 초심자로서 과도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노동의 가치 대비 더 큰 자산이 움직이면 숨을 쉴 수 없게 마련이다. 즉 월급이 400만 원인 사람은 자신의 전재산이 한달에 400만 원 이상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간단한 초심자의 규칙이다. 만약 총자산이 1억 원이라면 한달만에 4%가 이상이 움직이지 않는 투자가 좋다. 400만 원 이상을 잃어도 아무런 감정이 안 생길 정도의 경험이 생겼을 때 초심자를 탈출했다고 보면 된다.

물론 리스크의 균형점이 투자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투자의 신비한 비법이 있지 않느냐 묻게 마련이다. 이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위의 포물선은 모든 투자 기법에서 똑같이 포물선을 그리기 때문에 워런버핏도 예외가 있을 수 없지만, 반면 포물선의 크기 자체는 기법의 우수함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리스크와 상관 없이 형편 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면 포물선이 수면 위에 있는 구간은 매우 짧을 것이고 그만큼 돈을 벌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리스크가 중요하다지만 사실 투자 방법론의 차이에서 오는 안전 수익률의 차이를 무시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그 말이 맞음에도 중간에 한마디만 첨언하자면, 연 5% 수준의 수익은 제 아무리 평이한 투자전략이어도 리스크 관리만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이다. 주식 60%에 채권 40%를 단순 보유하기만 하더라도 최근까지는 연 5% 이상의 수익이 발생했다. 지나치게 용감하거나, 지나치게 몸을 사리지만 않았더라면, 걱정하지 않을 수준의 출렁임 속에서 자산이 불어나는 경험을 했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단순 보유하는 전략이 대단한 전략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전략을 찬양하는 이유는 섣부르게 리스크를 늘였다 줄이는 것보다 한결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세계 경제가 성장하는 것에 단순투자 하는 것만으로도 패가망신하거나 예적금 금리에 묶이는 것보다 우월한 수익구조를 짤 수 있다.

반면 더 우수한 투자전략을 채택하더라도, 리스크를 이해하지 못하면 수익은 포물선 아래로 곤두박질 치고 만다. 내 생각에 투자의 초심자라면 이 리스크 수준이 세달 기준으로 -10%가 넘어서서는 안되고, 특히 3달간 최대의 손실이 3달 월급을 넘어서서는 안된다. 제 아무리 좋은 투자라도 마찬가지다. 유휴 자금이 없어 쩔쩔 매게 될 수 있고, 불안감에 포지션을 지키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삶이 망가진다.

마지막으로 좋은 전략에 대해 논의를 해봐야 한다. 이미 다른 글들에서 많이 나눈 이야기라 짧게 반복하자면, 투자는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 그 타이밍은 ‘좋은 시장’과 ‘나쁜 시장’에 대한 아주 막연한 감으로도 구분이 가능하다. 주식하기 좋은 때가 있고, 부동산하기 좋은 때가 있고, 예금하기 좋은 때가 있는 법이다. 단순 보유하는 전략의 유일한 약점은 그 ‘때’의 존재를 외면하는 것인데, 좋을 때에도 나쁠 때에도 항상 투자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이러한 ‘때’마다 리스크의 구조가 바뀐다는 것이다. 동일한 액수의 주식을 들고 있어도 어떤 때에는 리스크가 과도할 수 있고 어떨 때에는 리스크가 너무 적을 수 있다. 어떤 때에는 주식이 월 20% 씩 움직일 수 있고 또 어떤 때에는 월 3%도 안 움직이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시장이 좋지만 언제든 폭락이 가능하고, 그 폭락의 폭이 20%를 훌쩍 넘기도 한다. 어떤 때에 어떤 리스크가 존재하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해서 주어진 리스크 안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이 답이다. 우수한 기법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매수 후 단순 보유하는 모델보다 조금만이라도 투자를 개선시키면 포물선의 크기를 대폭 키울 수 있다. 자신만의 타이밍과 자신만의 상품, 자신만의 투자처를 찾는 노력을 해보면서 포물선 안에서 조정을 해보자. 따지고 보면 정확한 균형점의 위치는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르고, 눈꼽만한 차이의 정교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심리적으로 버틸 수 있는 적정선에 와 있으면 충분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천영록 드림

‘딱 나까지만’ 민주주의

상위 N% 를 위한 민주주의의 땅따먹기가 아닐까?

원래 독재란 상위 0.001%가 세상 만민을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해보자. 반면 민주주의는 ‘상위 N%’ 라는 개념 자체를 삭제해버린 체제다. 상위 100%가 모두 함께 우리의 미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그러니 나머지는 민주주의를 사실상 부정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성장과정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보면, 암묵적으로 절대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의 민주주의’가 추구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한다. 그것이 매우 잘못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가만 보면, 지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지지해왔으나 이 이상의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고 비하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자기까지만 민주주의가 작용하기를 바라는 거에 다름 아니다. 오피니언 리더, 엘리트의 기준에서의 평등주의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옛시대의 자본가, 언론인, 정치인 모두 딱 자기의 원래 출신 계급까지만 민주화되기를 바라는 것 아니었을까. 자신에겐 소중한 일이니까.

예컨대 투쟁의 역사는 ‘나는 상위 5%인데 최소한 상위 5~6% 계층 까지는 민주적 절차에 권리가 열려야 되는 것 아냐?’ ‘아니지 나는 상위 20% 인데 최소한 상위 20% 까지는 권리가 열려야 되는 것 아냐?’ ‘아니지 나는 상위 30%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억울해 나까지는 포함해야지’ 같이 암묵적으로 하위 몇%는 이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최소한 나는 포함되었으면 좋겠다는 타협적 민주주의 내의 투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이런 말도 죄다 개소리일 수 있지만.

여기서 ‘민주’의 개념이 아직까진 100%의 국민 모두를 포함한 개념은 아닌 것만 같다는 것이다. ‘지적 능력이 있고 지각이 있는 나같은 사람’이라 흔히들 생각하는 개념이 상위 몇%에 해당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런 식으로 상위 계층 차상위 계층을 나누고 그 윗선에서 권력을 나눠야 하는 싸움이 아니었는가 한다.

좋다, 100%의 민주주의는 시기상조라고 치자. 100%라는 것은 제법 배타적인 개념이어서, ‘그렇거나”아니거나’ 둘 중 하나로 결론이 나야 한다. 나는 ‘아니거나’가 현재로선 더 유연한 사고라 생각하고, ‘그렇거나’로 가기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이나 고찰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100%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상위 몇 % 까지가 이 민주적 절차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일까에 대한 정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략적으로라도 말이다. 어설픈 체제화로 하위 N% 의 참여권을 배제하는 담론이 되어서도 큰일이지만, 사실 상위 계층의 사람이 알아서 다 결정하는 사회에서 굳이 100%의 민주주의인 척 하고 지내는 것도 지나친 위선과 가식이라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다. 나는 위선이 위악 보다 나쁘다고 생각한다. 진실에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거짓이 더 횡재하는 환경을 허용하기 때문에.

상위 1%가 의사결정하는 것은 현시대에 맞지 않다. 상위 5% 정도가 현실적으로 국가의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오피니언 리더들일 것이지만 그마저도 현시대엔 맞지 않다. 상위 10%? 20%? 그 기준은 무엇으로 둘 것이며, 어떻게 그들의 참여권을 강화하고 고무시킬 것이지? 언젠가 상위 50%, 상위 90%가 참여하게 하려면 무슨 제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결국 최다의 국민이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참 맛이다. 이 말에 부정한다면, 더 얇은 상위층의 독재 체제를 지지해야 하고, 이 말을 긍정한다면 더 넓은 상위층의 집단 의사결정을 장려해야하지 않을까. N% 를 어디에 둘지에 대한 싸움이다. 이대로, 우리는 100% 민주주의야, 라고 주장하면서도 뒤돌아서 ‘어리석은 국민이 뭘 알겠나’ 라고 지껄이는 것은 기만이 아닌가 한다.

물론 누구나, 딱 나까지만 민주화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위 1~10%의 계급에서 온 사람에겐 상위 99%가 모두 참여권이 있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까지’의 영역일 수도 있다. 더이상 그 ‘나까지’의 땅따먹기 싸움이 아니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고민해본다.